나는 항상 내가 누구라는 그 강제가 싫었다. 집에 냉장고 있는 사람 손들어라. 집에 차있는 사람 손들어라. 집에 전화있는 사람 손들어라.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나에게 대한 강제였다. 너는 누구라는 강제다. 너는 지금 이 공간 그리고 이 시간 속에서 누구라는 강제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싫었다. 나를 어떤 형태의 도식으로 묶는 모든 것이 싫었다. 나는 나이지만 주어의 나는 묻는 나이고 보어의 나는 답하는 나다. 나는 나이지만 나는 나가 아니고 나는 나가 아닌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과정 중이다. 여정 중이다. 나는 정해진 실체적 고정물이 아니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지만, 나는 사람일뿐 그것이 내 삶에 주는 정보라고는 다른 짐승보다 더 머리를 쓰면 더 나다운 나가되기위해 고민해야한다는 정도였다. 나는 정의되지도 규정되지도 않는 그냥 무엇일 뿐이다. 나는 죽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빼면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단지 내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나는 내일 정해지지않은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지지않은 일정 속에 그때 만들수있는 것을 만들어 먹는다. 커피를 마실지 녹차를 마실지 냉수를 마실지도 미리 정하지 않는다. 그냥 그날 기분이다. 일주일 계획도 없이 지금 최선의 연장선에서 내일을 기대한다. 오늘 논문 한편의 골격을 세웠고 책원고 작업을 했으니 내일도 그 일을 할 것이다. 아직 재미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이 수많은 우연이 필연 처럼 보이지만 그런 추억은 내가 앞으로 되고 싶은 무언가를 향한 착한 기억의 조작일 뿐이다. 나에게 착한 동네 형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도 이와 같다. 그는 그냥 그날 그 순간 재미나고 신난 것을 했다. 내가 누구라는 정의 속에 가두기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더 나다운 나가되려는 자기 긍정 혹은 자기애가 그를 움직였다. 지금 재미 없고 지금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런 나의 밖으로 벗어난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는 나의 안, 정말 나다운 나가 향할 나의 안, 순수한 나를 고민한다. 그렇게 나의 밖으로 나서기 위해 나의 안으로 깊어진다. 그 깊어짐 속에 나는 더욱 더 나가 되고 나는 더욱 더 나의 안에 녹아들어가면서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벗어난다. 나는 강제적 정의됨 속에 있지 않는다. 나는 그런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나는 그 시간 공간 그 시대적 질서라는구조 속에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답지 않는 나를 향해 나아가는 역동하는 그 무엇이어야했다. 그런 역동 가운데 나는 주체가 된다. 부정되고 긍정되면서 행해지고 당해지면서 말이다.
유대칠 2028 0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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