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힘이 때론 희망이지만 때론 폭력 가득한 절망이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힘이 때론 희망이지만 떄론 폭력 가득한 절망이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힘이 때론 희망이지만 때론 폭력 가득한 절망이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힘이 때론 희망이지만 때론 폭력 가득한 절망이었다.
더불어 살기 위해 죽자가 아니라
너 죽어 나 살자! 외치는 이기적 외침의 듣기 좋은 말, 듣기 좋은 거짓,
결국 그것이었다.
민족이란 이름이지만 그 민족은 몇몇이었고, 그 몇몇이 그들만 누리고 살았다.
국가라는 이름이지만 그 국가는 몇몇이었고, 그 몇몇이 그들만 누리고 살았다.
종교라는 이름이지만 그 종교는 몇몇이었고, 그 몇몇이 그들만 누리고 살았다.
가족이란 이름이지만 그 가족은 몇몇이었고, 그 몇몇이 그들만 누리고 살았다.
아들을 위해 강요 없는 강요로 희생시킨 이들에게 가족은 짐이다. 미워하면 위로워지지만 가까워져도 덜 외로워지지 않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소모되며 사라지는 가장 가까운 먼 곳,
민족도 국가도 종교도 다르지 않다.
나의 눈물 안아주지 않은 우리라며 우리가 아닌 우리였다.
결국 이 모든 듣기 좋은 이야기의 모임도 우리가 아닌 나를 생각하는 나들의 이기적 만남 속에 서로가 서로를 듣기 좋은 말로 가리며 외롭게 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풀 한 포기 같이 나약하니
죽여서 자신들의 이기심을 위한 거름으로 쓰자며
죽는 것이 너의 길이라 듣기 좋은 말로 위로하며
죽이는 살인마.
결국 누군가의 웃음을 위한 소비재일 뿐이었다.
오랜 애정을 주며 가족 처럼 안아주었지만 결국 그들을 위해 죽어가는 복날의 강아지들 처럼...
가장 가까운 먼 곳...
가정도 국가도 직장도 종교도 모두 믿지 않는 이들이 많다. 다들 그저 욕심의 공간이라고 말이다. 권력을 향한 욕심, 돈을 향한 욕심, 저 세상 좋은 곳을 향한 욕심... 결국 다른 곳과 다르지 않은 욕심의 공간, 그러니 그런 곳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의 그 미움은 종종 외로움이다. 한 없이 힘들 떄, 그들은 이용의 대상일 뿐, 더불어 있을 누군가는 아니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이용하고 국가와 직장이란 이름으로 이용하고 말이다.
우리가 되는 가족, 국가, 직장, 종교... 여전히 홀로 있는 그 외로움은 우리라는 더불어 있음을 향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 이름이 가족도 국가도 직장도 종교도 아닌 이름이라 하여도 말이다.
유대칠 2020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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