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어디에 쓸모가 있었을까? 철학은 물리학이나 화학 혹은 생물학 등을 열심히 연구한 이후에 한 학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학이나 법학 등을 열심히 연구한 이후에 익히게 된 학문인가? 사실 철학은 대학에 있지 않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는 기초학의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18세기와 19세기 형이상학이란 교과를 보면 책의 가장 앞에 간단하게 형이상학이나 철학을 정의하고 이후 엄청나게 간단하게 철학사를 정리한다. 너무 간결한 정리라서 그것을 철학사라고 부르지도 민망하다. 이후 존재론에서 있는 것 일반을 다룬다. 이어서 우주론, 철학적 심리학, 철학적 신학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으로 있는 것을 다루었다. 존재론은 철학적 신학을 익히기 위한 기초학이었다. 그리고 철학이 다른 학문에 대하여 그와 같았다. 철학과 다른 학문, 즉, 신학, 법학, 의학은 기초학과 그 기초학의 상위학이었다. 의학도 논리적 사유가 필요하고 윤리적 사유가 필요했기에 그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윤리학은 필요했다. 그러니 당연히 르네상스 의학 교수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의학으로가 아니라 기초학으로 주요했다. 지금 대학에서도 철학은 기초학으로 기능하면 좋겠다. 그러나 대학에서 철학은 독립된 학문이며 독립된 학과다. 기초학의 과정을 담당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실 독립된 학문으로 철학으로 있었던 적 없는 철학은 최근 200여년 동안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다. 철학이 무엇인지 형이상학은 무엇인지? 그러나 사실 대학에서 그 역할을 잃은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말해야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철학이 학문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는지 이미 다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이 독립된 학과, 기초학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되어 있으면서 철학이 생존하는 방법은 쉽지 않게 되었다. 왜 필요한지 말해야했다. 그리고 그 쓸모를 화려한 말빨에 내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지금 이 지구상 모든 철학은 자신의 자리를 상실했다. 의학도 신학도 법학도 각자 자신의 기초학은 자신의 기초학으로 만들어간다. 논리학이나 정치철학 그리고 법철학이란 철학적 기초학의 성과 없어도 의사가 될 수 있고 법률가가 될 수 있다. 철학적 신학에 대한 이해 없이도 신학을 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적당한 자기 화려한 언변이면 충분히 대단해 보이는 철학자나 신학자가 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성리학은 권력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정파의 이론을 위하여 쓸모 있는 기초학이었다. 통치의 기초학 말이다. 그러나 더 이상 통치의 기초학이 아닌 성리학은 매우 개인적인 취미가 되어 버렸다. 성리학은 성과를 내는 공간이 아닌 취미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향교를 찾아 대학이나 중용을 공부하는 이들은 더 이상 더 상위의 무엇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취미다. 대학의 성리학도 특별한 어떤 성과를 낼 수 없다. 사라지는 과거의 문화를 유지하려는 인간문화제와 같다. 성리학을 연구했거나 혹은 유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이 사회의 혼란을 묻는다 해도 어떤 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있지만 개인의 좋음을 위해 있을 뿐, 우리에게 뜻을 이룰 수단으로 조선의 성리학은 있지 않다. 지금 철학이 그와 같다. 철학을 왜 연구해야하는가 묻는다면 유럽과 미국의 사례를 드는 것도 웃긴 일이다. 그들이 한다고 우리가 할 필요는 없다. 철학을 왜 해야하는지 철학의 쓸모는 무엇인지... 아직 우린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학에서 기초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어떤 뜻을 이루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아니 이 지구에 철학은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2020 07 11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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