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앞에 놓인 돌은 그냥 가만히 있지 않는다. 스스로 돌로 존재하고 있다. 돌로 존재하는 자기 정체성의 운동을 하고 있다. 조금 딱딱한 이야기지만, 사실 그렇다. 그는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다. 그 본질의 충실함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좁혀져 있지도 않는다. 그 돌은 나에게 말을 건내기도 한다. 내 딸은 울산의 바다에서 주워온 돌을 나에게 선물했다. 딸에게 이 돌은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문진’이었다. 넘어가는 공책와 책을 잡아주는 무거운 돌은 딸에게 그렇게 쓸모있는 벗이었다. 바닷가에 그렇게 수백년 있었을 그 돌은 다시 나의 방에 들어와 나의 옆에서 문진으로 있다. 돌은 딱딱하고 무거운 본질의 구현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홀로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마주하는 누군가의 앞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무지하게 많은 돌을 들고 오는 것도 아니다. 그 가운데 벗으로 있을 수 있는 돌만 가져온다. 돌에겐 수많은 가능성이 있었다. 돌은 돌로 있었지만, 돌과 마주한 그 관계성 속에서, 그 만남 속에서 돌은 다양한 그 무엇이 되어갔다. 그럴 힘을 만남에서 얻었다. 나 역시 별 것 없는 철학노동자로의 삶을 살지만 누군가에겐 소중한 그 무엇이 될지 모른다. 나는 그저 나로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나는 그저 나로 있었을 뿐인데, 나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글을 적을지 모르고, 누군가의 분노에 공감하는 글을 적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그저 홀로 있는 듯 하지만, 나의 홀로 있음은 개방되어 있다. 돌이 문진이 되고 집이 되고 바다의 벗이 되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돌은 스스로 그저 돌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만남의 장에서 돌은 그때 그때 자신의 벗에게, 그 공간에 자신의 쓸모를 보인다. 돌은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는다.
우리집 뒷 산의 작디 작은 바위도 이젠 오랜 시간 힘겨운지 사그러지는 나무도 그렇게 저마나 자기로 있으며 동시에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 그 시간 그 공간에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 그렇게 나무는 잘려 산의 거름이 되기도 하고, 바위는 이끼의 집이 되기도 하고, 힘겨운 이의 의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은 사실 어느 하나 그냥 가만히 있지 않는다.
돌도 작은 풀 하나도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는다.
스스로 자기 완전성을 향하여 부서지고 있고, 동시에 자기 있음의 공간과 시간에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만나고 있다.
돌이 언젠가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듯이
나 역시 언젠가 죽어 사라지는 거싱 당연하다.
그 동안 돌도 나도 나로 있으며 동시에 부서져 누군가에게 쓸모가 되어간다.
결국 없던 것이 나이고 없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없음에서 없음으로 이행하는 잠시의 모습, 그 사이 만남으로 누군가에게 작은 쓸모를 이루며 사라지는 것,
나쁘지 않다.
유대칠
2020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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