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렵다. 사실 우리말로 되어 있어도 어렵다. 당연하다. 독일 사람에게 독일 철학이 어렵고, 프랑스 사람에게도 프랑스 철학은 어렵다. 단지 어럽지만 그 철학을 부여잡는 것이 그 공간에서의 부조리에 대한 치열함 혹은 합리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살고 있는 그 곳의 고난의 참 의미를 궁리하고자 힘들지만 읽어간다. 그 고난의 참 의미, 그 뜻이 누군가에겐 진보적이고 누군가에게 보수적이라도 그렇게 읽어간다. 참 뜻을 알아내기 위해 말이다. 적당히 현실의 문제에 고개 돌리고 신비 속에 숨어 낱말 자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더 형이상학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언어 유희로의 장난감일 뿐이다. 참 철학이라면 고난에 고개 돌리지 못한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당한 고난이 그 고난의 전부라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이 고난만이 유일하고 이 고난만이 유의미하다 주장하는 순간 다른 누군가의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폭력이다. 남의 고난을 조롱하지 않으며 더불어 울고 있는 그 자리에서 '울고 있음'의 터, 바로 그 자리에 다져진 형이상학, 그러면 그 말의 어려움을 떠나 그 시대 우리에게 뜻으로 다가오는 철학이 될 것이다.
나는 생각하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저 존재한다. 그냥 있기만 한다. 무엇으로 있게 되는 그 터, 그 터는 우리라는 터이고, 그 터에서 나는 뜻을 가지고 너에게 다가가고 너는 뜻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온다. 너와 나의 말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라는 터, 이 '울고 있음'의 터에 세워진 철학이라면, 읽히고 읽힌다.
유대칠 2020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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