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불어존재론

'울고 있음'의 터에서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7. 9.

철학은 어렵다. 사실 우리말로 되어 있어도 어렵다. 당연하다. 독일 사람에게 독일 철학이 어렵고, 프랑스 사람에게도 프랑스 철학은 어렵다. 단지 어럽지만 그 철학을 부여잡는 것이 그 공간에서의 부조리에 대한 치열함 혹은 합리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살고 있는 그 곳의 고난의 참 의미를 궁리하고자 힘들지만 읽어간다. 그 고난의 참 의미, 그 뜻이 누군가에겐 진보적이고 누군가에게 보수적이라도 그렇게 읽어간다. 참 뜻을 알아내기 위해 말이다. 적당히 현실의 문제에 고개 돌리고 신비 속에 숨어 낱말 자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더 형이상학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언어 유희로의 장난감일 뿐이다. 참 철학이라면 고난에 고개 돌리지 못한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당한 고난이 그 고난의 전부라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이 고난만이 유일하고 이 고난만이 유의미하다 주장하는 순간 다른 누군가의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폭력이다. 남의 고난을 조롱하지 않으며 더불어 울고 있는 그 자리에서 '울고 있음'의 터, 바로 그 자리에 다져진 형이상학, 그러면 그 말의 어려움을 떠나 그 시대 우리에게 뜻으로 다가오는 철학이 될 것이다.

나는 생각하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저 존재한다. 그냥 있기만 한다. 무엇으로 있게 되는 그 터, 그 터는 우리라는 터이고, 그 터에서 나는 뜻을 가지고 너에게 다가가고 너는 뜻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온다. 너와 나의 말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라는 터, 이 '울고 있음'의 터에 세워진 철학이라면, 읽히고 읽힌다. 

유대칠 2020 07 09

20대 후반 당시 나의 마을 어진가에서

'더불어존재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이론의 종이 아니다.  (0) 2020.07.12
지금 우리에게 철학은 쓸모있는가?  (0) 2020.07.11
가장 가까운 먼곳  (0) 2020.07.08
그냥 가만히 있지 않는다.  (0) 2020.07.07
그리운 사람...  (0) 2020.06.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