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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메모

철학의 대전환... 나는 중세를 그리려 한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9. 20.

지중해 연안을 돌아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 나의 철학적 작업에 매우 소중한 무엇이 되기 위해서다. 단순한 남의 과거가 궁금해서가 아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지중해 연안의 많은 철학적 결실 속에서 철학을 진행하고 있고 또한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국제법의 존재론적 근거가 바로 그곳에서 그곳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이후 온 세상에 퍼진 것이다. 그 이외 그곳에서 다져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유대교 역시 지금 여기 나에겐 그저 남의 일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교회와 성당을 다니고 있고, 지금 뉴스에는 어렵지 않게 이슬람과 유대의 충돌을 보고 있다. 그 충돌이 그저 남의 일인가? 당장 석유값이 오를지 모르고 우리의 청년들이 파병을 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여러 논의들이 오가기 시작할지 모른다. 이 땅에서 시작할 종교가 아니지만 그리스도교는 이제 더 이상 남의 종교가 아니다. 우리의 종교가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 지중해 연안의 사상을 돌아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 나에게 절대 그저 남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중세를 보려 한다. '중세', 제법 이름 난 칼럼리스트도 아무렇지 않게 중세적이란 말로 누군가의 실수를 지적한다. 즉 '중세'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세에 대한 그러한 태도는 참으로 웃긴다. 그것은 근대의 개신교과 근대 철학이 만든 이상한 허상이다. '중세'를 가톨릭과 연결하고 사고하던 개신교는 중세라는 시간의 부정을 통하여 원래 그리스도교의 첫 정신으로 돌아간 자신들을 부각하려 하였다. 즉 정반합의 변증법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합'이라면 가톨릭 교회와 같은 것으로 등치된 중세는 '반'이었다. 루터의 노선에 충실하던 신학자이며 그리스도교 역사학자인 마티아스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Mathias Flacius Illyricus, 1520-1575)는 1559-1574년에 <교회사(Ecclesiastica historia)낸다. 새로운 시작은 새로운 역사적 초석이 필요하다.. 역사적 초석 없이 단단한 새로운 시작은 힘들다. 자기 돌아봄으로 만들어진 지금 나의 변화에 대한 확고한 자기 합리화는 그 자체로 지금 이 변화의 흔들리지 않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련된 <교회사>에서 중세는 적그리스도의 시대다. 그러한 <교회사>에 따르면 루터의 그리스도교 개혁 운동은 적그리스도교에 대한 대항이 외며 고대 그리스도교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 된다. 원래 있어야 할 그 종교적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 강한 향수병을 자극한 <교회사>의 이러한 태두는 오랜 시간, 아니 지금도 중세를 가톨릭으로 기억하게 하고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시대라 기억하게 한다. 개신교의 첫 신학자들에게 중세는 철학이 신학을 지배하는 인간 이성 우위의 시대였다. 그것이 부정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 이성으로 신을 향한 능동적인 이해의 노력이 결국 부정적 대상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렇다. 사실 중세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매우 논리적이다. 심지어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엑하르트' 역시 무척이나 논리적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신학 교육을 위하여 논리학은 필수적인 학문이었고, 형이상학과 윤리학 그리고 자연학과 같은 학문을 익히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이 모든 것을 익힌 이후 신학을 익혔다. 이것은 신학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중세 대학에게 철학을 일종의 일반학이었다. 의사가 일반의 과정을 이후 전공의 과정을 거치듯이 그렇게 철학과정이란 일반과정 이후 의학, 신학, 법학과 같은 전공과정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는 신학 뿐 아니라 모든 대학의 학문이 철학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성서 주해를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권위를 이야기하진 않았다. 철학이란 인간 이성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철학이란 수단으로 신앙을 최대한 열심히 알아듣고자 한 것은 이성적 동물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가장 사람다운 열심으로 신앙을 하려는 애씀이었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어느 순간 이성의 한계를 경험하고 신 그 자체는 이성이 아닌 신비의 대상임을 자기 애씀의 결실로 수긍하고 받아드렸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의 모습이 과정 이단적이고 적그리스도의 모습인지 이후 개신교 교회사 학자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이어졌다. 예를 들어, 많은 부분 그리스도교 종교개혁가들과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 '클레르보 베른하르트'와 '요하네스 타울러'와 같은 중세 사상가가 그러하다. 그리고 개신교의 교회사 연구가인 하이코 오버만 등의 학자들이 제안하는 '리미니의 그레고리'와 '토마스 브라드워딘'  그리고 '오캄'등의 중세 사상가 역시 그러하다. 첫 시작에서 무리하게 중세를 부정함으로 가톨릭교회를 부정하려는 시도들이 더 이상 현실적 힘을 가지지 못한 지금, 조금 더 객관적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다투던 시기에도 가톨릭교회 내부 내적 개혁의 선두인 예수회의 철학적 성과인 수아레즈 등의 철학적 성과는 독일 개신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큰 거름이 되었다. 루터 등 여러 개신교회의 제안과 비판은 가톨릭 교회 내부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되었고 오랜 자신들의 노력을 체계화하는 시기가 되기도 하였다. 즉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종교개혁이란 불리는 그 시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배재되어야할 존재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통하여 자신이 되어가며 또한 그 가운데 서로의 긍정적 성과를 소비하는 그러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근대 개신교, 즉 새로운 걸음을 시작하는 개신교의 입장에서 앞선 마티아스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의 <교회사>가 보인 교회사적 입장 속 중세는 무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즉 중세는 적그리스도의 시대란 것이다. 그렇게 중세는 억울하게도 자신의 오랜 노력의 결실로 만들어진 후손에게 부정의 대상이 되었다. 

때 마침 등장한 르네상스로 기억되는 문예부흥기라는 시기, 혹은 근대인의 인간 중심적 사유는 중세를 신을 중심으로 사유한 광신의 시기로 기억하게 하였다. 그러니 현대 많은 중세 연구가들은 근대로 대표되는 인물들 속 중세 철학으 모습을 보이려 하였다. 중세는 광신의 시대가 아니라, 당신들이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그 사상 속에 녹아든 합리적 사상을 구사한 인물임을 보이려 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가장 열심히 중세 철학을 알리려 한 20세기 철학사가인 질송은 데카르트 가운데 중세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였다. 

중세를 누군가는 너무나 이성적으로 신을 따지는 시대라 했다. 그러니 그 시대는 적그리스도의 시대다. 그리고 누군가는 비이성적인 시대, 광신의 시대라 하였다. 왜 같은 시기를 두고 서로 다른 기억이 등장하는 것일까? 근대 개신교는 중세라는 이름으로 중세라는 과거를 돌아보기 보다는 가톨릭교회라는 현재를 응시하며 싸웠다. 오런 시간 정통으로 존재하던 그들을 적그리스도로 만들어야했고 그들의 지난 여전을 동시에 적그리스도의 여정으로 만들어야했다. 울만(Carl Ullmann)과 같은 개신교 역사학자가 타울러와 같은 이들이 중세에 존재한 아직 설익은 종교개혁가라고 하여도 그런 이들은 흔하지 아니면 기본적으로 중세는 개신교의 등장을 설명할 부조리한 무엇이어야 했다. 그리고 근대의 합리성으로 무장한 철학자들에게 중세로 기억한 것은 '계시 종교'였다. 도저히 이해되지 못하는 것을 두고 고민하는 시대가 그들에겐 광신으로 보였다. 결국 근대의 등장과 함께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와 크게 나누어지고 동시에 철학과 신학도 크게 서로 나누어지기 시작한다. 종교를 광신으로 보며는 이들이 아무리 합리적 종교를 위해 애쓴대 해도 결국 종교는 이성의 편에선 미개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신론의 시대가 철학자들의 편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의 그 첫 씨앗도 바로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중해 연안의 중세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그저 남의 일이 아니다. 중세를 바라본 이러한 시선 나누어짐이란 결실 속에서 만들어진 근대 이후 철학에 나는 살아가고 그 철학 속에서 나는 나의 철학을 만들어갈 것이다. 앞선 유럽의 중세와 중세를 향한 시선에서 만들어진 여러 철학적 조건들이 동아시아의 우리에겐 큰 고민 없이 그저 주어졌다. 그래서 중세를 광신으로 보는 시선도 중세를 과도한 합리성으로 보는 시선도, 서로 조화되기 어려워보이는 이 두 시선이 중세를 설명하는 방법이 되어 버렸다. 조금의 고민이라도 해 본다면 얼마나 모순되는 시선일지 알게 될 것인게 말이다. 이제 그 지중해 연안의 중세를 나의 시선에서 다시 한번 그려 보려 한다. 

교황 중심의 시대라는 것이 겨우 천년 역사 동안 카노사의 굴욕 하나로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더욱 더 많은 수의 교황 굴육을 알기는 아는가? 황제 마음대로 교황을 바꾸던 시기, 교황의 자리가 위태로웠던 그 많은 시기를 알기는 아는가? 보편 논쟁이 왜 중세인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존재론적 담론인지 그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실용적 학문인기 알기는 아는가? 성화상 논쟁이 그들에게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지 알기는 아는가? 관심은 있었는가? 그저 누군가 이렇다는 과거의 이야기로 풀어주면 그것을 듣고 암기하진 않았는가? 사실, 이 모든 것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나 스스로 하지 않고 누군가 만든 논리 속에서 그 논리가 만든 엉성한 답을 암기해왔다. 이제 스스로 그 논리를 만들어 지중해 연안 중세를 그려보려 한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유대칠 2020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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