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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메모

중세 성당 관련 메모 1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 3.

600년경 1470만명이던 유럽의 인구는 950년경 2260만명이 된다. 1348년 흑사병(페스트)가 창궐하기 시작하기 전 14세기 초에 유럽의 인구는 7300여명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인구의 증가는 농업 기술의 발달과 도시 성당 두 가지 요소 인한 것이다. 이 둘은 따로 있지 않다. 12세기 전반 절정에 이른 농기 개척의 결과는 경작지를 크게 확장시켰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두 배에서 세 배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3년 주기로 한 윤작과 날 위에 넑적한 쇠를 비스듬히 댄 비대칭형 쟁기의 도입으로 가능했다. 거기에 개선된 마구와 농사에 사용되는 밑거름에 대한 발달기술의 탓도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유럽 전역 모두가 이와 같은 발달을 이룬 것은 아니다. 개별 지역과 지주에 따라 그 성당의 크기와 규모는 서로 달랐다. 최고 수확량을 기록한 농지는 클레보의 성 베르나르가 설립한 수도원인 시도 수도회의 부속 농지였다. 고대 도시인 우룹스(urbs)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을 애써 한 곳에 모았다. 그리고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융화시켰다. 그러나 중세 도시는 그렇지 않다. 고대 도시는 한 곳을 애써 모은 성격이 있다면, 중세 도시는 사회적 특성을 가진다.

4세기 경 로마제국은 행정 구역을 성벽으로 둘러쌓다. 이러한 성벽으로 인하여 주변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즉 고대 도시 유룹스는 요새인 카스트룸(castrum)이 되었다. 카르트룸은 밖과 안을 구별하였다. 당시 사회적 혼란을 반영하는 것이다. 로마제국은 서서로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있지 못했다. 특히나 서유럽은 더욱 더 그랬다. 리메스(limes)라는 경계선은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였고, 안은 도시라는 한나의 질서로 유지되는 공간이었다. 카르트룸은 방어적이었다.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성당은 그 카르트룸의 중심이었다. 10세기 경 카르트룸으로 있던 도시는 또 변화를 경험한다. 주교들만이 그 중심인 성당에 상주하였고, 소수들이 그 가운데 거주하였다. 어느 문헌에 의하면 50-100가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11세기에 들면서 전원에서 더 이상 먹고 살 수 없던 이들은 새로운 목적의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는 하나의 새로운 그 무엇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 그 연대의 중심엔 경제와 상업이 있었다. 농촌의 장원은 도시를 위해 존재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도시는 시장에 형성되고 여러 사람들이 만나는 공간이 되었다. 도시를 중심으로 육로와 수로를 통한 사람들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육로는 오랜 시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던 로마제국의 도로망을 재정비하게 하였다. 새로운 도로망이 만들어졌다. 1073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3세는 개혁을 단행한다. 그 개혁은 이미 910년 베르농에 세워진 부르고뉴의 클뤼니 수도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개혁의 목적은 교회를 교회 밖 속인들의 세력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수도원에서 이 운동의 영향으로 사도들의 삶을 본받아 궁핍과 고행을 기본으로 하는 수도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카르투지오 수도회, 시토 수도회 등이 바로 그러한 수도원이었다. 서유럽은 변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을 구행하는 계층과 기도하는 계층 그리고 노동하는 계층이란 세 계층으로 사람들을 나누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 서유럽을 이끌던 권력은 바로 카롤링거 왕조다. 

11세기 새로운 도시의 기능에 따라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도로망을 위해 다리가 만들져야했다. 그리고 당시 많은 집들은 종교적 목적을 위한 경우가 아니면 목재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서서히 석재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석공은 서서히 목공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처음 요새는 흙과 나무로 큰 지적 고민 없이 만들어졌다. 주거 목적의 석조건축물이 성장하면서 곧 도시 방어능력에 영향을 주었다. 11세기 중반 석재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11세기 상업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많은 교량이 세워졌다. 첫 석재 교량은 전체가 돌인 것이 아니었다. 아래는 석재이지만 윗 부분 상판은 목재를 사용하였다. 수도원은 보다 더 앞서 이미 석재로 지워졌다. 11세기 초 대수도원장 생튀그가 건축한 틀뤼니의 유명한 마구간을 보면  이미 돌로 지워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건물만이 석재로 세우다가 서서히 부속 건물들도 석재로 세우기 시작하였다. 도시 방어에서도 12세기 방어용 성벽이 세워졌다. 이는 대규모 공사였다. 거대한 성벽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해야했다. 1137년 외드 3세가 디종에서 2630m에 이르는 성벽을 세웠다. 필리프 오귀스트 왕은 센강의 왼쪽 둑을 1190년에 세웠고, 이어서 1210년 오른 편도 세웠다. 이는 625에이커의 땅을 성벽으로 감싸게 하였다는 말이다. 석재 벽은 이미 성 안과 밖을 확실하게 구분해 주었다. 이제 과거 단순한 군사적 방어의 목적을 넘어 벽 안 거주민 사이의 응집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1364년 샤를5세는 센강 오른쪽 강둑을 싸는 새로운 성벽을 구축하였다. 그렇게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도시가 되었다. 그 직전 1348년 황제인 카를 4세는 옛 도시를 반원 모양으로 감사는 새로운 도시를 몰다우 강 오른 편에 세웠다. 이 폭은 25 넒이의 길이고, 1650채의 석조건물이 세워졌다. 이 모든 것을 3500m 성벽으로 둘러쳤다. 그 가운데 8만 5천 명에 이르는 주민의 요구에 따라서 15개 교구로 운영되었다. 발달된 건축 기술 가운데 고딕 성당이 등장한다. 중세 고딕 성당은 100m보다 더 작은 성당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1160년 세워진 라옹 성당은 24m이고, 1194년 세워진 샤르트르 성당은 37m였다. 그리고 1225년 세워진 보베 성당은 46.7m였다. 1050년에서 135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지금의 프랑스 파리로 수백만 톤의 돌이 성당을 세우기 위해 들어왔다. 80개의 대성당과 400개의 성당이 세워졌다. 성당은 큰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길드가 만들어졌다. 길드는 둘로 나뉘어있었다. 하나는 석재를 다루는 석공의 길드이고 다른 하나는 목재를 다루는 목공의 길드였다. 길드라는 전문적인 업자들이 조직을 만들어 참여함으로 성당 사업은 더욱 더 융성하게 된다. 15세기 말 절체법, 즉 돌을 기하학적으로 상당한 정교하게 절단하는 기술이 발달함으로 성당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다양한 기술은 더욱 더 성당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이러한 발달 가운데 성당 건축 현장은 건축과 관련된 지식인과 그 지식인의 지식을 현실 속에 구현하는 많은 기술자들이 있었고, 그 기술과 지식에 따라서 점점 나누어졌다. 이들 사이의 나눔은 곧 소득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자신이 일한 만큼 일당으로 급료를 받았다. 채용은 즉석으로 이루어졌다. 석회를 섞는 일을 담당하는 이들은 비교적 높은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 상당히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한 급여가 달랐다. 쉽게 그 기술 수준과 숙련도에 따라서 급여를 다르게 주었다. 개별적 노동 행위는 서서히 기업화되어간다. 개별적인 석공이 돌의 표면에 남긴 서명은 이를 확인하게 해 준다. 그러나 개별 인부의 서명은 건축주의 서명으로 대체된다. 1268년에서 1270년 작성된 왕실 건축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1630명의 인부와 400여명의 석공 그리고 30여명의 대장장이와 목수 또 1000명 정도의 미숙련 노동자와 마부가 등장한다. 1294년에서 1295년 사이 프랑스 생라자르 성당의 기록을 보면 미숙련공과 숙련된 석공 사이의 임금은 세 배의 차이가 난다. 많은 이들을 조직적으로 건축하였으며, 급여는 숙련과 기술 등의 위계에 따라서 철저하게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 말로 어느 정도 기업화되어있었다. 

중세 성당을 세우는 건축가들은 건축주의 이상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구체적 성당 가운데 녹아내려 노력하였다.

유대칠 메모함

왜관의 가실성당이다. 나의 처지에 외국 성당을 갈 순 없을 듯 하다. 죽기 전에 외국에 다시 한번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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