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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신학

더불어 있음의 신학과 홀로 있음의 신학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24.

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신학'이란 말은 지금은 거의 그리스도교가 독점하다시피 사용합니다. 물론 이슬람교 역시 신학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가장 오랜 시간 신학이란 말로 자신의 신앙을 정리하고 체계화한 종교를 들라면 그리스도교를 제외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아예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와는 신에 대한 생각이나 종교적 논의 자체가 많이 다르기에 그것은 차후 살펴보기로 하고요. 그런데 신학이란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 사용됩니다. 예수가 등장하기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신학이란 말을 사용한단 말입니다. 신에 대한 연구를 시도한 것은 그리스도교 이전부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헬라 철학자들의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체계화하고 정리하면서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교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헬라 철학자들이 생각한 철학의 신은 제우스와 같은 존재와는 사뭇 다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가장 탁월하기에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이나 목표를 가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신을 향하여 움직이지고 신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지만 신 스스로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홀로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부동의 원동자로 신은 스스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며 다른 모든 것의 목적이지만 스스로는 부동, 즉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존재들은 다른 존재에 의하여 움직여집니다. 수동적으로 당하기도 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 길을 걷다 중앙고등학교 앞에서 한 아주머님이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분은 건너 병원으로 무신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분을 안아서 들어 올린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지만, 그냥 별생각 없이 그렇게 합니다. 아주머님 옆 아들의 울음도 있고 아주머님의 아픔도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아픔이 저에게 전해졌으며 저는 그냥 움직여진 것입니다. 더 나은 쪽으로 더 좋은 쪽으로 그렇게 움직여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엔 그런 일들이 보이지 않지만 많습니다. 물론 군대에서 장군은 움직이지 않고 병사들을 움직이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 말고도 이 세상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여지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헬라스 철학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여지는 것으로 세상을 나누어 보고 그 논리 속에서 온 우주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움직이는 것이 더 탁월하고 움직여지는 것은 덜 탁월하죠. 그러니 육체를 움직이는 영혼이 더 탁월하고 육체는 움직여지니 덜 탁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다른 것에 의하여 존재하지도 않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홀로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부모가 없으니 존재하게 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있던 존재이고 사람들이 아무리 죽고 죽여도 스스로는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자신의 뜻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차갑고 차가운 존재가 어쩌면 헬라스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그 부동의 원동자입니다. 

 

그러니 유럽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신의 모상으로 온전히 창조된 사람이니 자신들만 홀로 있다는 생각을 쉽게 하였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하여도 그들은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온전한 존재인 신과 같이 그들도 신만큼은 아니라도 가장 온전하게 남에 의하여 움직여지지도 않은 차가운 존재로 있었던 것입니다. 여동생이 경제적 문제로 노비가 될 지경이라며 집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오게 허락해달라는 이에게 안셀무스는 차갑게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을 믿는 신앙에서 이 세상 이런저런 고생에서 자유로운 것이 중요하다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동생이 노비가 돈 문제로 노비가 되어 힘겨운 시간을 살아간 것을 걱정하고 눈물로 기도하는 이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것입니다. 차갑지요.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차갑게 수도원에서 혹은 성당에서 혹은 유럽이란 공간에서 하느님을 따라 차가운 홀로 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에서 신은 철저하게 홀로 있습니다. 신은 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와 함께 하니 감동적이겠지만 신에 대한 입장은 대체로 신은 우리 없이도 존재하는 절대자, 철저한 홀로 있음이었습니다. 헬라스 신학의 영향이 참 크지요. 

 

유교도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이 땅 백정의 아픔과 기생의 아픔을 안아주지 못했습니다. 양반만이 홀로 누리며 살았지요.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인물동이성론'이란 논쟁으로 합리적으로 구조화시켜 보려 했습니다. 천한 이는 존재론적으로 천하고 귀한 자신들은 존재론적으로 귀하다는 논리는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 잔인한 존재론이 이 땅을 지배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살다 간 안 되겠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과학은 과거와 비교되기 힘들 만큼 발전하였습니다. 이제 성직자들이 그 시대의 학자이던 시대는 사라지고 엄청난 과학적 성과는 진화론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어서 종교 없이 이 세상에 평화를 이야기하는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그 시기에 종교가 아닌 공산주의가 그 시기 많은 아픈 민중에게 벗이 되었습니다. 등 돌리고 하느님을 따라 차갑게 홀로 있던 교회는 그렇게 작아져 갔습니다. 그렇게 역사를 통하여 참된 신은 그런 신이 정말 자기 자신이 아님을 가르친 것일까요? 교회는 이제 홀로가 아닌 더불어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만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나와 대화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도 동등하게 합리적이기에 강제가 아닌 대화로 전교하겠다는 생각도 이때 등장합니다. 유럽이 아닌 지역에 신학교가 세워지고 시간이 지나 라틴어가 아닌 현지 언어로 미사가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회교리라는 것도 결국은 더 이상 홀로 있지 않겠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위계적 질서도 사실 헬라스 신학에 근거한 위계적 세계관에 근거합니다. 신과 신의 계시를 받는 성직자와 그 성직자에게 수동적으로 따르며 구원을 청하는 평신도의 구조 말입니다. 더불어 있음의 세계에선 이런 위계의 질서도 다시금 생각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홀로 있는 신이기도 하지만 그저 철저하게 홀로 차갑게 있는 신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됩니다. 2년 교육을 받아 알게 된 것일까요? 예수는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자신이 아닌 사람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신의 사랑은 신이 아닌 우리의 아픔마저 품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보면서 그저 감성적으로 울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있음의 신학에서 정말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하느님은 바로 우리와 더불어 있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고, 더불어 있기 위해 기꺼이 아파하신 것입니다. 

 

지금 종교로 인하여 많은 다툼이 있습니다. 종교가 혹은 신앙이 자신만을 답이라며 나 아닌 이를 하느님의 품에서 몰아내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이 그렇게 홀로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사실 잘 보면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잔인하게 홀로 있는 것이 답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홀로 누리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신을 그렇게 해석해 버린 것은 아닐까요? 사람의 욕심을 신이라 생각하며 고상한 언어로 치장하며 그 욕심을 따라 산 것은 아닐까요?

 

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신앙 없이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삶을 투신하는 이들을 보면서 이기적으로 성당과 교회 그리고 수도원에서 홀로 있겠다는 그 차가움이 과연 하느님의 뜻일까 다시 생각해 봅니다. 

 

유대칠 

2020 10 24

 

[앞으로 주님의 기도를 연재하려 합니다.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실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분황사에서 유대칠 (ç)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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