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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불행하여라 5 - 돈으로 높아지려 하지마라!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28.

<마태오복음> 23장 11-16절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엄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무서운 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흔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위한 일이 무엇일까요? 사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이웃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있다는 것은 단지 누군가와 더불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자기 내어줌으로 우리 되어 더불어 하나 됨을 이루고 있다면 바로 그곳에 하느님과 더불어 있는 곳이며, 바로 그 품에 살아가는 이들의 삶 자체가 하느님 계심의 증명이 될 것입니다. 이런저런 신학자들의 하느님 계심의 증명보다 더 강하게 우리에게 뜻을 품고 다가오는 하느님 계심의 증명은 바로 더불어 있음으로 드러날 것이라 믿습니다. 

 

결국 하느님을 위한다는 것,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웃을 위한다는 것이고 이웃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이웃은 매우 큰 범위겠지요. 저 멀리 아프리카의 사람도 어쩌면 우리와 더불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 우리의 이웃일 것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자기 내어줌으로 우리가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위한 것이고, 만나는 것이며, 나를 위한 것이고, 너를 위한 것이며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자기 내어줌은 높아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엄밀히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같아지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품 속에서 한 형제자매인데 높고 낮은 것이 어디 있을까요. 같아지는 것, 모두 더불어 하나 되는 곳엔 모두가 같은 격으로 있을 뿐입니다. 더 놓아지려는 마음, 어쩌면 그 마음이 우리를 파괴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눈먼 인도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돈에 더 큰 염려를 합니다. 돈이 있어야 안정적으로 성당과 교회를 유지하고 더 크고 화려한 곳에 하느님을 모실 것이 말하지만 사실 그 말 뒤엔 크고 화려한 곳으로 자신을 드려내려는 것은 아닐까요? 돈은 결국 더 높아지려는 것입니다. 더불어 있지 않고 더 높이 올라서 내려다보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돈으로 더불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돈으로 더불어 웃기보다는 홀로 웃으며 스스로 높이고 남에게 높임 받기를 좋아하니 말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루카, 16장 15절) 

 

다른 이들보다 높아지기 위해 그 자리에서 스스로 의롭다며 하느님에게 더 가깝다며 말하는 이들은 사실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들이며, 더불어가 아닌 홀로의 삶만을 누리려는 이들입니다. 예수님들은 그러한 이들을 혐오스럽다 하십니다. 그리고 불행한 사람이라 하십니다. 

 

너무 거창할 것 없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더불어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있다는 것은 그저 곁에 서 있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내어줌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내어주며 천국을 간다거나 복을 받을 것이라는 욕심이 아니라, 그저 자기 내어줌이 그 자체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없이 모두가 우리로 더불어 하나 되어 있을 때, 행복은 자연히 찾아옵니다. 행복은 그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애씀입니다. 더불어 살기 위한 애씀입니다. 

 

불행은 홀로 있겠다는 애씀입니다. 지금 남보다 더 많이 더 높이 올라가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그것이 바로 불행입니다. 하느님 품에선 위로 아래도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돈으로 모든 것이 질서 지워지는 사회, 어쩌면 모두가 불행을 향하여 애쓰는 것이 아닐까 걱정입니다. 오늘도 다짐합니다. 더불어 있자. 더불어 있기 위해 애쓰자. 그 애씀이 행복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0 27 

[한동안 '불행하여라' 하신 예수의 <마태오복음> 23장 말씀을 묵상하며 연재하려 합니다.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실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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