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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불행하여라 7 - 복음대로 사는 행복한 이는 울보입니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30.

<루카복음> 6장 24-26절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예수님은 아니 계심으로 있으십니다. 이상하지요. 아니 계신데 계시다니요.

사실 배부른 이들은 굶주리지 않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배부른 이들은 더 배부르고 배고픈 이들은 더 배고파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점점 빈부의 차이는 깊어집니다. 부유한 이들의 악행은 제대로 처벌을 받지도 않습니다. 마약을 가져와도 성매매를 해도 그들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오히려 그런 누림으로 스스로를 더욱더 높입니다. 

그렇지요. 나쁜 사람들은 더 나빠지고 착한 이들도 나쁘게 살아가는 것이 정답인가 착각을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쁜 짓으로 배부른 이들은 굶주리게 될 것이라 합니다. 가난으로 그들이 굶주리지 않게 될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에 굶주린단 말씀이실까요? 

예수를 따라 살겠다는 신앙을 가진 이들은 그저 먹는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합니다. 그래야합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말씀은 이웃과 더불어 살라합니다. 어찌 사는 것이 바른 것인가 묻는 말에 예수는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라 합니다. 나의 이웃을 나의 몸처럼 가까이 더불어 있으라 했습니다.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용서하며 더불어 살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인 것이 복음입니다. 의사는 건강한 돈 많은 이와 더불어 있을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아프고 힘든 이들과 더불어 있는 것에 자기 자리입니다. 의사에게 복음대로 사는 것은 아프고 힘든 이들의 옆에서 그들을 벗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생에게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제자들의 옆에서 그들의 벗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그 자리에 있으면 항상 누군가와 더불어 있게 됩니다. 더불어 있는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그런 자리입니다. 제자의 행복이 선생의 행복이고, 선생의 행복이 제자의 행복입니다. 환자의 행복이 의사의 행복이고 의사의 행복이 환자의 행복입니다. 더불어 서로가 서로의 행복에 있어 이유가 됩니다. 그렇게 있는 것이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생이 제자보다 돈을 생각하고 의사가 환자를 두고 돈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홀로 누리며 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성직자와 목회자 그리고 수도자는 온 힘을 다해 신도들과 더불어 하느님과 하나 되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더 많은 돈을 생각하거나 더 큰 권력을 생각하거나 더 높은 건물로 자신을 치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을 들고서 강론하고 설교하고 묵상해도 결국은 '홀로 있음'일 뿐입니다. 복음의 길에서 벗어나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이룬 거대한 권력과 많은 돈을 보며 웃는 이들은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아픔을 조롱하며 웃는 꼴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면, 그렇게 복음에 따라 있어야 할 곳이 있다면, 그들의 그 경제적 성공도 그 성공과 더불어 있어준 이들의 기쁨과 더불어 있어야 했으며,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이 깊은 빈부의 차이는 자연히 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홀로 누리며 웃는 것에 집중하면서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눈물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니 계심으로 계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의 고난 가운데 강한 무기를 들고 찾아와 우리의 편이 되어 주지 않으십니다. 막상 그때는 아니 계시지요. 그런데 그때 하느님은 우리의 양심으로 우리를 움직이십니다. 가난한 이를 향하여 이끌리듯 움직이게 합니다. 능동인지 수동인지 모를 힘으로 이끌리듯 향합니다. 그것이 복음에 따른 삶입니다. 가난한 이를 조롱하여 웃지 않고 오히려 웁니다.

복음대로 살아가는 행복한 이는 그래서 울보입니다. 나 아닌 우리 가운데 또 다른 나인 너의 그 아픔을 알아서 웁니다. 우리 가운데 나 아닌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라서 웁니다. 남의 아픔이 아니라서 웁니다. 그렇게 눈물 가운데 하나 되어 있는 우리 가운데 예수님은 이미 더불어 계십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더불어 있음의 모습으로 우리와 하나 되어 더불어 있으십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아니 계시지만, 더불어 우는 이들의 그 눈물에 이미 더불어 있으시며 우리의 양심을 울리며 우리에게 가만히 있지 말라 소리치십니다. 우리 움직이게 하십니다. 그 더불어 있음으로 있을 때, 우리는 굶주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미 완전한 하느님과 더불어 하나 되었으니 홀로 자기 이기심만을 생각하던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더불어 더 큰 완전성을 향하게 됩니다. 더 큰 완전성이 우리 영혼을 채워 굶주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홀로 웃는 이는 그 영혼이 항상 소유의 결핍으로 가난합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으며, 가난하게 굶주리고 있습니다. 웃지만 잃을까 두려운 마음에 항상 싸울 준비를 하며 그렇게 웃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 행복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불행한 삶입니다. 더불어 살지 않으며 홀자 웃는 이들의 웃음, 그런 웃음은 절대 참 행복에서 나온 웃음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보이시는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우리의 눈엔 아니 계시지만 우리의 존재가 당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더불어 있는 이들은 행복할 것이고, 홀로 배부르며 홀로 누리는 이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울보인 더불어 사는 이, 그렇게 행복한 이가 되어야겠습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0 30

<저의 칼럼 모음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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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모두가 홀로 누리며 홀로 높아지려는 시대, 그 아집으로 인하여 수많은 이들이 아프고 힘든 시대, 참된 더불어 행복하게 위한 더불어 있음의 철학과 더불어 있음의 신학을 궁리해 본다. 우리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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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불행하여라' 하신 예수의 <마태오복음>에 이어서 <루카복음> 6장 말씀을 묵상하며 연재하려 합니다.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실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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