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어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마태오복음 5장 10절 )
의로움으로 힘겨운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 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그러나 이곳으로부터 멀리 남으로만 있어야 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 하느님의 나라가 이곳에 이루어지길 청하라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바로 이곳에서 빛이 되도록 청하라 하셨습니다. 기도란 그냥 그리 말하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든 개신교회든 성공회나 정교회든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들이 <주님의 기도>로 기도를 드립니까. 그러나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애쓴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하느님의 뜻, 그 의로움을 위하여 애쓴 이들이라면 힘겨움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 뜻, 그 의로움은 무엇입니까? 이런저런 신학자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이런저런 설교문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다가왔습니다.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탈출기 22장 24절)
'이자를 받으려고 그에게 돈을 꾸어 주어서도 안 되고, 이득을 보려고 그에게 양식을 꾸어 주어서도 안 된다. 나는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느님이다.’ ‘너희 곁에 사는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자신을 너희에게 팔 경우, 그를 종 부리듯 해서는 안 된다. 그가 품팔이꾼이나 거류민처럼 너희 곁에서 살며 희년이 될 때까지 너희 일을 하다가, 자기 자식들과 함께 너희를 떠나서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 조상 전래의 소유지를 되찾게 해야 한다. (레위기 23장 37-41절)
유다 사람들은 아픔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 고난의 시간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아픔, 부조리의 아픔을 아는 이들은 고난자의 고난을 알지만 가해자의 폭력도 압니다. 고난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지만 동시에 가해가 얼마나 달콤한 지도 압니다. 이것이 사람의 슬픈 모습입니다. 의로움이 없는 곳에서 그리도 아파했는데, 막상 자신이 그곳을 나와서는 자신의 힘으로 다시 의로움 없는 곳을 만들어 버리고 스스로 가해자가 됩니다. 한국 군인에게 고난의 시간을 당하고 아파하는 여러 베트남 할머님들을 보면서 우리의 위안부 할머님들의 아픔이 더 슬프고 아픕니다. 그렇게 아파하고 그렇게 힘들었는데 우린 또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어 그 가해의 달콤함을 즐긴 것은 아닌지요. 독일 히틀러의 그 잔혹한 만행으로 아파하고 힘들어하던 이스라엘의 저 유다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종교라며 다른 인종이라며 저지르는 이슬람 사람들에 대한 폭력을 봅니다. 그 오랜 시간, 그렇게 힘든 아픔을 온 역사로 겪었다지만 막상 자신이 강자의 자리에 오르자 스스로는 가해자의 가해, 그 달콤함에 빠져듭니다. 그렇게 가해의 의로움에 빠져드는 것이 사람의 나쁜 모습인가 봅니다. 스스로 이집트에서 그렇게 힘겨운 시간을 경험하였지만 스스로 강자가 되면 자신이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 하느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아파한 그 고난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너희가 아픔을 아니 타인의 아픔에 너희도 나쁜 이가 되지 마라 하십니다. 너희가 빵 하나 없어 아파하였으니 누군가에게 빵 하나를 내어주며 이자를 계산하는 이가 되지 마라 하십니다. 너희가 돈도 없고 권력도 없어 누군가에게 노비와 같은 생활을 하였기에 너희는 누군가 돈도 권력도 없는 이가 찾아온다면 그를 노비로 삼아 힘겹게 하지 말고 자유로이 살아가도록 도와주라 합니다. 아픔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난을 아는 사람이라면, 온몸으로 그 고난으로 울어본 사람이라면, 타인의 고난에 고개 돌리지 말고, 그 고난에 벗이 되는 것, 하느님이 우리에게 청하신 일이십니다.
박해의 시간을 지난 종교는 그 박해의 아픔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가난하고 힘겨운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리도 강조하던 초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박해의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잊힙니다. 거대한 교회 건물이 더 중요하고 깨끗한 교회 건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노숙자를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크고 깨끗한 교회에 냄새나고 더러운 이들이 찾아오는 것은 거룩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프고 힘든 이들의 남이 되어 버린 교회, 아픔을 잊은 교회, 자연스럽게 타인의 아픔 앞에 무감각해진 교회, 성경에 쓰인 글을 형식적으로 읽으며 이웃 사랑하자 외치지만 막상 아프고 힘든 이웃을 윗사람이 아랫사람 보듯 보는 교회, 어쩌면 아픔을 기억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나쁜 교회 일지 모릅니다.
아픔을 아는 교회는 아픔을 알아서, 부조리의 힘으로 아파하는 그들의 눈물이 남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바로 나의 눈물이라서, 그냥 가만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때론 나서서 분노하고 때론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옆에서 그들을 안으며 이런저런 폭력에 아파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노하고 그렇게 아파하며 아프고 힘든 이들을 안아주고 있는 것이 교회겠지요.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돈을 내어주며 이자를 계산하지 마라 하느님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두고 계산기를 들지 말라는 말로 들립니다. 노숙자 등 이 사회의 아프고 가난한 이들 앞에서 계산기를 들지 말고 우선 어찌 그들의 벗이 될지 고민하고 고민해 보아야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교회 일지 모릅니다. 그렇게 이 세상 이런저런 일에 아파하고 다투고 싸우는 것, 그것이 신앙을 흔드는 분심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이런저런 부조리들이 하느님을 조롱하며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의 아름다운 피조물을 파괴함에도 아무 일 없는 것이 누구도 없는 하늘만 보고 기도하는 그 신앙이 정말 하느님과 선을 긋는 신앙이 아닐까요? 불의함에 분노하고 싸우며 아프고 힘든 이들의 그 아픔을 남의 것으로 두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은 가진 자들의 눈 밖에 나기에 힘겨운 시간을 가질 것이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는 것이 최고하는 시대에, 나누고 나누는 삶은 패배의 삶으로 혹은 바보의 삶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보다 나으 앞 그의 아픔을 만나 그 만남의 순간 그를 안아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정말 기도가 삶이 된 그러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박해의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양반도 노비도 백정도 없이 하느님의 자녀 되어 한 형제자매로 있겠다는 외침에 윗사람 아랫사람으로 나누어 당연히 누리고 당연히 당하던 조선은 박해로 응답했습니다. 그 차별에도 양반과 백정이 형제자매로 더불어 있으며 그 시간을 이겨냈습니다. 우린 우리를 기억해야 할까요? 이젠 우리도 거대한 교회의 주인이 되었으니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멀리하자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이젠 우리도 양반이 되었으니 노비와 백정 같은 이들을 무시하자는 것을 배워야 할까요? 가해자의 자리가 아니라, 그럼에도 고난자의 자리에서 그 시대 부조리의 고난으로 아파하는 이들의 옆에서 아파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자리가 아닐까, 그것이 신앙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난한 이들의 앞에서 이자 계산을 하는 교회, 가난한 이들의 앞에서 윗사람처럼 갑질 하는 교회,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여기며 남 이야기하듯 이야기하는 교회, 이것은 나쁜 교회입니다.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자 할 때 바보가 되는 것이 신앙이고, 아프고 힘든 이들을 보며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 하지 하면서 더 열심히 더 빨리 누군가를 이기며 살려할 때 그 힘든 이의 아픔과 더불어 기꺼이 늦어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쉽지 않은 신앙,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낮아지고 어떻게 아프고 힘겨운 이들과 더불어 나아갈 것인지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더불어 나아가가기 위해 아프고 힘든 시간을 기꺼이 마주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이라 생각해 봅니다.
복되어라,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시련을 이겨 낼 때에 그는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 서간 1장 12절)
정말 복된 이들의 행복은 우리의 눈에 기쁨을 누리는 이로 보이는 이들의 행복이 아니라. 의로움, 더불어 살아감을 위하여 아파하고 힘겨워하는 이들의 그 삶, 그 삶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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