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 요한 4장 8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장 19절)
신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합니다. 신은 어떤 존재이고 그 신을 향한 우리의 구원은 어떠한 것인지 참으로 길고 긴 시간 참으로 다양한 논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것으로 가지고 서로 다투고 어느 순간엔 서로를 이단이라며 비난하며 그렇게 신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토대로 서로 다툽니다. 그런데 막상 <요한의 첫째 서간> 속 그 신은 사랑이라 참으로 간단하게 정의되어 나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항상 사랑하고 있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던 그때에서 그분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마태오복음> 5장 43절엔 "원수도 사랑하라" 합니다. 이웃 사랑은 당연하고 원수도 사랑하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는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라고 합니다. 예수꼐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바로 그 지혜의 말씀은 사랑입니다. 당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듯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 주었으니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가 아니라 먼저 사랑하라 합니다. 먼저 무엇을 기쁘게 하면 사랑하겠다가 아니라 먼저 사랑하라 합니다. <로마 신자에게 보낸 서간> 13장 10절은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사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라고 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정말 제대로 사랑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사랑입니다.
신학은 사랑학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삶의 사랑학'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은 신에 대하여 단순히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앎이 삶이 되어야 하는 그러한 앎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에 대한 신학은 사랑학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그 길은 앎으로의 사랑이 아니라 실천으로의 사랑의 길이기에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그 길에 대한 고민은 '삶의 사랑학'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종교가 이 사회의 악이 되어가는 것은, 즉 나쁜 무엇이 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원수도 사랑하라는 그 사랑은 집단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항상 자기 아집의 끝에서 그 아집을 부수고 나 아닌 누군가의 아픔으로 향하라는 그러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더불어 있음입니다. 신학은 결국 어떻게 신과 이웃 그리고 원수 심지어 사람의 밖에 있는 우주 전체라는 피조물과 더불어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답은 항상 정지해서는 안되면 또 다른 답으로 스스로를 부수고 나아가며 그 답의 논리성에 구속되지 않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랑으로 항상 나 아닌 너에게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을 하는 이에게 일종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신학은 모르겠고 내가 하고자 하는 '더불어 있음의 신학', '더불어 신학'이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사랑학이 되어야 하고 '삶의 사랑학'이 되어야 하니 말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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