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20절
20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서 만물을 화해시키셨도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평화롭게 하셨도다. 땅 위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이 구절을 읽으며 다시 샤르댕 신부의 글을 찾아 읽게 됩니다.
"주여! 엔의 숲이 아니라, 지금은 아시아 대초원 가운데 있지만, 또다시 빵과 포도주로 제대도 없이, 그저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을 넘어서 장엄하게 놓인 순수의 실재를 향하여 저 자신을 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 저는 전체 지구를 제단으로 삼아, 그 위에 쌍의 노동과 애씀을 당신을 향하여 드리겠나이다.""
저는 사제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평신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 앞에서 이런 사람들 사이의 나눔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일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치를 이루고 있다 함은 차이도 차별도 없이 있다 함입니다. 차이와 차별이 있는 공간이면 일치는 없습니다. 둘이 생기고 셋이 생기고 넷이 생깁니다. 하나는 그렇게 나누어집니다. 쪼개어지고 쪼개어진 서로를 서로에게 남이 됩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있던 그 하나는 나누어져 다수가 됩니다. 다수가 되어 서로 다툽니다. 원래 자신이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의 마음속 중심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힌두교 등은 서로 다툽니다. 서로 자신의 답이 정답이라면 말입니다. 그 가운데 지금도 많은 목숨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남의 죽음 앞에 우린 무감각합니다. 우리가 아니니 말입니다. 서글픈 현실입니다.
노동도 그저 사람만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저기 저 대자연은 하느님의 품에 제대로 있지 않은 것, 그저 사람에게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만이 노동으로 저 대자연을 마음대로 자신의 욕심에 따라 쓸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저기 저 산속 수많은 생명들은 우리와 남이 아닙니다. 저기 저 대자연은 우리에게 사용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노예가 아닙니다. 저기 저 대자연은 저기 밤하늘의 천체들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머금고 지금도 잊지 않고 그 길을 살아가는 존재들일뿐입니다. 자기 내어줌으로 아파도 그 아픔이 슬픔이 아닌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린 대자연과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나와 다른 종교도 다툼의 대상이고 대자연도 지배의 대상이라 합니다. 그런 마음은 분열로 가득합니다. 자기 아집으로 가득합니다. 모든 만물을 화해시키는 분의 그 사랑, 십자가의 피로 모두를 화해시켜 다시 일치를 이루로 우리에게 온 목숨으로 이야기하는 그분의 그 사랑을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의 들리고 읽히는 말씀에 그때그때 감성의 흔들림은 있지만 여전히 들어야 하고 읽어야 하는 것은 멀기만 합니다.
평신도인 나 역시 저기 저 대자연 속에서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한 미움이나 구별 없이 이 세상 전체를 제대로 이루어지는 미사의 한 부분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직접 연주하시는 거대한 신비한 우주라는 교향곡의 한 음 한 음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저 한 음이지만 전체의 일치를 이루는 그 한 음이 되어 살아간다면 그것 자체가 신비이고 그것을 알고 그 한 음 됨에 순응하는 것도 신비입니다. 그 순응함, 대자연과 일치를 이루고 다른 종교와 사상과 다투지 않고 모두가 사랑이란 그 하나로 모여 자기 아집으로 다투지 않고 그렇게 우주 전체라는 교향곡에 한 음 됨에 순응함, 그 한 음들이 모여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거대한 은총이고 그 자체가 거대한 바름이 아닐까요.
하느님을 향한 나아감과 하느님을 향한 이끌림, 이 능동과 수동의 일치 가운데 우린 정말 제대로 의로운 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어제 길을 걷다 작은 풀잎 하나를 한참 보았습니다. 참 애쓰고 살아가는 그 애씀도 우주라는 신비의 한 부분이고, 그 신비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 애씀에 미소 짓는 나 역시 잠시 하느님의 그 사랑을 향한 작은 연주회의 일원이 된 듯하여 기뻤습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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