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될 때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입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예배하는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서 4장 23절)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더불어 있음 바로 그곳입니다. 물리적인 장소가 그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과거 지하무덤에서도 초대 교회의 신앙은 부끄러움 없이 자라왔습니다. 조선 시대 박해의 시간을 생각해 봅시다. 거대한 주교좌성당 없이도 우리의 신앙은 진실했고, 그 진실함 앞에서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기 우리 그리스도교가 부당한 권력에 손을 들어주거나 그들의 폭력에 눈을 감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님'을 보아도 '문익환 목사님'을 보아도 '안중근 의사'와 '3.1 운동의 그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더불어 있다는 그 하나의 힘으로 부당함에 싸워왔습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있는 사람으로 이웃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때로 목숨을 걸며 일제와 싸웠고 독재와 싸웠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다는 것, 많은 민중에게 부끄러운 모습이 있다는 것은 과거도 지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안중근의 마지막을 더불어 하지 않은 가톨릭 교회와 부끄럽게도 친일의 길을 간 목사들과 같은 흑역사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있다면서 누군가는 하느님과 더불어 있는 건물의 크기와 하느님과 더불어 있는 그 모임을 위해 이웃에게 부끄러움을 일을 했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있지 않으면서 하느님과 더불어 있고자 했습니다. 사실 바로 그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무시되었습니다. 우선 나의 몸을 더 건강하게 하고 여유가 생기면 이웃을 안아주겠다는 생각은 항상 이웃을 나의 뒤에 세우게 합니다. 나는 항상 어딘가 아프고 부족하기에 항상 이웃을 뒤로 둡니다. 그래도 더 부끄러운 것은 그렇게 살아도 그렇게 예수의 명령을 무시해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렇게 부당한 권력의 보호 속에서 높은 성당과 교회를 올리고 웅장한 찬양을 연주하고 노래하면 하느님이 그 자리에 더불어 있어 주시리라 정말 믿고 있나 봅니다.
이렇게 큰 성당과 교회가 많지만 그리고 그 가운데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매일 찬양과 기도를 드리지만, 이 나라 국민 가운데 신구교 합하여 가장 큰 수를 가진 종교가 그리스도교이지만, 이 사회는 아프기만 하고 그 가운데 신자들의 역할을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노숙자들에게 겨울을 얼어 죽어가는 시간입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의 그 추위와 더불어 하는 교회에 하느님도 더불어 함께 해주지 않을까요? 그들에게 차가운 교회에 하느님이 더불어 함께 하실까요?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한 학대는 너무나 부끄러운 지경입니다. 영하 20도의 비닐하우스에서 외롭게 죽어간 외국인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벽 시간 더 이상 글을 읽기 어려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영하 20도의 차가운 칼날이기에 그를 그렇게 외롭게 죽게 한 것은 아닌가 우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 차가운 영하 20도의 마음에 우리 교회의 신자들은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까요? 혹시나 성당을 다니고 교회를 다녀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 속에서 그들을 마주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과 더불어 하지 않는 교회와 그들과 더불어 하지 않는 신앙에 하느님은 더불어 있으실까요? 어쩌면 영하 20도의 차가운 마음엔 하느님도 더불어 있으실 수 없을 듯합니다.
코로나 19로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지만 조금 더 근원적으로 하느님 앞에 그리고 이웃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과 더욱더 하나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웃을 더욱더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과의 더불어 있음의 따스함은 이웃과 더불어 있음의 따스함과 비례할 것입니다. 이웃에게 차가운 영하 20도의 사람이 그리고 바로 그렇게 차가운 공간에 이웃도 더불어 있지 못하지만 하느님도 더불어 있지 못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중근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가톨릭교회는 영하 20도의 차가운 종교였는지 모릅니다. 일본의 편에서 일본의 승리를 위해 무기를 헌납하던 개신교의 인사들도 영하 20도의 차가운 종교였는지 모릅니다. 그런 영하 20도의 종교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영하 20도의 난방되지 않는 비닐하우스 생활을 강제한 우리의 사회보다 더 따뜻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정말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더불어 있다면 그 더불어 있음의 체온으로 나도 너도 우리 모두도 따스하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있음, 그 안아줌의 따스함은 나만의 것도 너만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는 영아 20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더불어 있는 신앙이 아니라 홀로 있음의 신앙이 아닌가?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난방 잘 되는 화려한 교회 건물이 교회는 전부가 아닙니다.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하느님과 영과 진리 안에서 더불어 있음이며, 그 더불어 있음의 자리에 따스함은 당연할 것입니다. 이웃은 더 이상 남이 아닌 우리로 더불어 있을 것입니다. 따스하게 말입니다. 지금, 무연고 노숙자들의 외로움 죽음과 홀로 외롭게 죽어간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기도해봅니다. 그리고 다짐해봅니다. 더불어 있자고 말이다. 부끄럽지 말자고 말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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