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시오.
23 사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거울 속에 바라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이런 사람은 자기를 바라본 다음에 나가서 즉시 그 생김새를 잊어버립니다.
25 그러나 자유의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무는 사람, 곧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행복할 것입니다.
26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해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경건함은 헛된 것입니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 깨끗하고 흠 없는 경건심은 고아와 과부들이 괴로움을 당할 때 찾아보며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편지> 1장 22-27절)
자발적 가난이란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 가족은 이미 나면서부터 가지는 운명입니다. 누군가는 10대에 수십억을 가집니다. 그 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기도 합니다. 마약을 해도 용서가 됩니다. 폭력으로 누군가를 아프게 해도 용서가 됩니다. 이미 그는 보통의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 다르게 자랍니다. 노동자의 벗이라며 수년에 한번 직원 식당에 와서 국자 들도 국물 나누는 사진 찍으며 노동자의 아픔을 안다 이야기하는 그는 노동자와 다른 사람, 보통의 사람과 다른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누지 않습니다. 나눈다는 이미지로 자신을 꾸며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지금 그들에게 그 부유함은 나면서부터 가지는 운명입니다. 또 다른 이들이 있습니다. 나면서 가난한 사람입니다. 나면서 그냥 가난합니다. 2020년 12월에서 64명의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노동 현장에서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끼여 죽었습니다. 11월엔 74명 10월에도 74명 9월엔 73명 8월엔 88명... 그렇게 가난한 노동자는 코로나 19로 죽어간 아픈 영혼보다 더 많이 자본주의의 욕심과 무관심이 만든 부조리함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들에게 가난은 자발적이지 않고 숙명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부조리한 환경 속에서 살다 죽어간 것입니다. 자발적 가난, 그들의 귀에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오히려 '자발적 나눔'이나 '자발적 공유'가 적당한 말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소유의 시대, 자본주의의 시대, 가장 쉬우며 가장 큰 기적 같은 일이 바로 '공유'인 듯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며 살아간다면, 예수의 말씀처럼 이웃을 나 스스로를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면, 그렇게 더불어 있다면 '공유'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웃이란 나와 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나와 같은 핏줄도 아니고 그의 경제적 성공이 나의 성공이 되지도 않으며 그의 경제적 실패가 나의 실패도 아닌 그런 어찌 보면 남입니다. 그런 남을 향한 연대, 남과의 더불어 있음이 남을 남이 아닌 우리 가운데 나 아닌 나인 너로 만든다 생각합니다. 나와 남이 아닌 나와 너의 우리가 된다면, 자발적 공유는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예수의 말씀이 쉽지 않습니다. 들으면 아름다운 말이지만 삶이 되지 못합니다.
삶이 되지 못한 앎은 그저 생각 조각일 뿐입니다.
돌아보아야합니다. 거룩함을 말하는 종교는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매달 수십 년의 생명이 노동 현장에서 죽어가는 그 아픔에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매달 고통의 날을 보내는 힘없고 나약한 생명들의 아픔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지 돌아보어야 합니다. 아픈 자를 치유해 주신 그 예수의 기적을 이 땅에서 이어갈 그 종교가 말은 거룩함으로 가득하지만 막상 현실에선 <성경>이 아닌 계산기를 들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알뿐,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극악한 악인도 무엇이 선인지 알지만 그렇게 살지 않을 뿐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묵상한다면서 현실과 떨어져 하늘만 보고 있는 묵상만을 묵상이라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어야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교가 제대로 된 종교라면 이 세상 부조리에 고개 돌리고 하늘만 바라보며 마음의 평화만을 강조하진 않을 것입니다. 사회적 정의! 그 정의를 위하여 기꺼이 작지만 뜻있는 걸음을 걸을 수 있는 종교이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너의 아픔을 남의 아픔이라 고개 돌리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비구들이여, 영원하고 영속하여 변하지 않은 소유물을 본 적이 있습니까?" 싯다르타가 묻자 제자들을 답합니다. "본적이 없습니다. 부처님." 그런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라 삽니다. 자신의 소유만이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준다 믿고 살아갑니다. 말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이웃 사랑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라며, 아프고 힘든 이들을 향한 나눔으로 살라는 예수의 말씀에 그러겠다 답하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경건은 알아서 될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알아서 될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참된 경건함이란 사회적 약자들이 아프고 힘들 때 그들의 편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편지> 이 글, 오랜 시간 성당을 다니고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어디 한 번을 읽고 들은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은 앎의 이름이 아니라, 삶의 이름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1 01 12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실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 혹은 국민은행 96677343443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위의 두 권은 저의 칼럼 모음집과 묵상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 두 권의 책은 저의 저서입니다. 더불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대칠, <복음이 전하는 더불어 삶의 행복> (이 책은 링크된 '부크크 서점'과 '예스 24' 사이트에서만 구매 가능합니다.)
www.bookk.co.kr/book/view/94794
유대칠, <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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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대한민국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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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신성한 모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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