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어린 (친구)들이여, 여러분에게 써 보냅니다. 여러분의 죄는 그분의 이름으로 용서받았습니다.
13 아버지 된 이들이여, 여러분에게 써 보냅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계시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에게 써 보냅니다. 여러분은 그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14 어린 사람들이여,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된 이들이여,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계시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어 여러분은 그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15 세상도, 또한 그 안에 있는 것도 사랑하지 마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 육의 욕정과 눈의 욕정과 재산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17 세상과 그 욕정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18 어린 사람들이여, 지금은 마지막 시간입니다. 반그리스도가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대로 이제 많은 반그리스도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간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9 그들은 우리 가운데서 나왔지만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했다면 우리들과 함께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으레 드러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20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어졌으니,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21 여러분이 진리를 모른다고 여러분에게 써 보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진리를 알고 있으며 또 그 진리에서 거짓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써 보냅니다.
22 거짓말쟁이는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바로 반그리스도입니다.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누구나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고, 아들을 고백하는 이는 아버지도 모십니다.
24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온 것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게 하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온 것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여러분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머무를 것입니다.
25 이것은 그분 친히 우리에게 언약하신 약속이니,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한 1서> 2장 12-25절)
우리 가운데 하느님은 이미 이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그 힘은 바로 '양심'입니다. 그런데 '양심'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욕심'입니다. 때론 '욕심'이 미화되고 합리화되면서 '양심'인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헛갈립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압니다.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솔직하게 '양심'인지 '욕심'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더 불행한 것은 아예 자신의 삶을 두고 그러한 고민 자체를 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욕심'이 삶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바로 그 생각에 움직이는 것은 양심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죠. 그러나 우리 가운데 설령 나에게 이득이 없다 하여도 우리 모두와 더불어 전체를 이루며 우리 가운데 주어진 나의 길을 그냥 묵묵히 가는 것, 바로 그것이 '양심'입니다. 남들이 무엇이라 하든지 상관없이 때론 조금 바보 같아 보여도 우리 가운데 나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가는 것, 그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에 따라 살아가면, 이 세상 온갖 어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물론 몸은 힘들 수는 있습니다. 조금 더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때론 바보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에 따라 살아가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조금은 선명합니다. 적어도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며 살아가면 쉽게 남을 힘들게 하진 않습니다. '양심'에 귀 기울이고 최대한 집중하고 또 집중하며 있으니 말입니다. 그 '양심'은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울림'입니다.
사실 성당과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하느님의 울림은 이슬람 신자에게도 불자에게도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 역시 하느님의 품 안에서 하느님을 드러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창조한 악마나 지옥으로 갈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모양으로 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 가운데 '양심'의 소리, 하느님의 울림은 우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 '양심'의 울림에 따라 모두가 전체를 이루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서로 다투는 일 없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종교라고 죽이거나 비난하거나 하는 일도 없어지겠지요. 이 모든 것들은 '양심'이 아니라 '욕심' 때문입니다. 더 잘 나고 싶은 '욕심'! 때론 더 거룩해 보이고 싶은 '욕심'은 스스로의 신앙을 더 나은 단계로 진화하는 것을 막아서고 제 자리에서 멈추게 합니다. 성당이나 교회에서 이런저런 봉사를 하면서 제시간에 미사와 예배에 참석하여 늦지 않는 것이 그냥 신앙의 전부라고 믿어버리게 만듭니다. 정말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부조리와 다투고 고민하고 궁리하면 자신의 삶이 힘들어지니 그냥 성당이나 교회를 마치 친목단체처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도 '욕심'입니다. '양심'에 따른 신앙은 '거짓' 앞에서 분노하며 움직입니다. 자기 욕심의 부끄러움도 압니다. 그러나 욕심의 신앙은 그것을 모릅니다. 욕심의 신앙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우리 가운데 모두가 전체를 이루며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아집이나 욕심이 아닌 양심의 소리에 의하여 살아야 합니다. 욕심은 세상의 것에 흔들리고 세상의 것에 지배받지만 양심은 그것을 벗어나 하느님을 향하게 하고 우리를 더욱더 우리답게 더불어 있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로 이끕니다. 바보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신앙이니 말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1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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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권은 저의 칼럼 모음집과 묵상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 두 권의 책은 저의 저서입니다. 더불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대칠, <복음이 전하는 더불어 삶의 행복> (이 책은 링크된 '부크크 서점'과 '예스 24' 그리고 '교보' 사이트에서만 구매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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