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보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으니,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될는지 아직은 밝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을 실제 모습 그대로 뵈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런 희망을 걸고 있는 모든 이는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요한 1서> 3장 1-3절)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존재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쉽게 우린 우리 스스로에게 절망하고 누군가와 비교하며 우리 자신을 쉽사리 낮추어 보기 때문입니다. 더 큰 것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며 더 작은 나를 초라하고 실패한 존재라 쉽게 여깁니다. 심지어 그렇게 자신 앞에서 자랑하며 무시하는 이 앞에서 당연한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삶의 노하우라도 하나 더 받으려 합니다.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 그런데 과연 더 크고 더 작음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더 큰 집에 살아서일까요? 더 많은 주식을 가져서 일까요? 더 좋은 대학을 다녀서 일까요? 더 많은 권력을 가져서 일까요? 만일 이러한 것이 기준이라면, 우린 지옥을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절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지옥입니다. 권력은 항상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다른 이들과 싸워야 하고 더 많은 돈은 또 더 다른 더 많은 돈을 향하여 계속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됩니다. 우리네 행복이란 정말 이 싸움에서 이기며 누리는 승리감의 기쁨일까요? 자신보다 약하고 아픈 이들을 이기며 누리는 쾌감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네 행복이란 참으로 나쁘고 잔인합니다. 사실 앞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도 '사랑'이 행복의 기준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불어 있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항상 홀로입니다. 홀로 남보다 더 큰 집에 살아야 하고 홀로 남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져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항상 홀로입니다. 더불어는 없습니다. 더불어는 성가십니다. 홀로 앞서 가기도 바쁜데 더불어가 무슨 소용이냐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다운 나로 있을 수 있는 터가 우리라는 전체 안에서 가능함을 기억해야 합니다.(<대한민국철학사> 25쪽) 홀로 행복한 것이 참 행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사실을 넘어 철학의 사실입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결국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우리 가운데 더불어 잘 살 궁리를 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지혜란 것도 더불어 잘 살기 위한 지혜였습니다. 홀로가 아닌 더불어 우린 살아가는 존재이며, 우리의 행복도 나의 행복도 홀로 외로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감에 기본은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가 쉼 없이 이야기하는 그 사랑은 우리 자신이 남에게 희망이 되게 하고 남이 나에게 희망이 되게 합니다. 나와 네가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될 때 우리 사회는 천국이 됩니다. 이곳에 천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멀지 않게 됩니다. 바로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이니 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인 그러한 나라 말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닌 살아서 누리는 천국,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사랑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설령 손해라 해도 계산기 들고 따지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바보 같이 보입니다. 어리석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보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며 그 비교 속에서 자신을 불행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되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며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참 일꾼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참 행복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1 02 15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실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 혹은 국민은행 96677343443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위의 두 권은 저의 칼럼 모음집과 묵상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 두 권의 책은 저의 저서입니다. 더불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대칠, <복음이 전하는 더불어 삶의 행복> (이 책은 링크된 '부크크 서점'과 '예스 24' 그리고 '교보' 사이트에서만 구매 가능합니다.)
www.bookk.co.kr/book/view/94794
유대칠, <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www.bookk.co.kr/book/view/92628
유대칠, <대한민국 철학사>
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3690705\
유대칠 <신성한 모독자>
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55401217&orderClick=LOA&Kc=
'우리강학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안에 씨에 충실해 봅니다. (더불어 신학 요한 1서 읽기 9) (0) | 2021.02.23 |
---|---|
잡초가 그분 안에 머물듯이 (더불어 신학 요한 1서 읽기 8) (0) | 2021.02.21 |
사랑 가운데 산다는 것 (더불어 신학의 요한1서 읽기 6) (0) | 2021.02.14 |
양심의 신앙과 욕심의 신앙! (더불어신학의 요한1서 읽기5) (0) | 2021.02.10 |
어둠이 아닌 빛에 산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더불어 신학의 요한1서 읽기4) (0) | 2021.02.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