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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유대칠의 철학사 이야기 1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0. 17.

젠장. 방금까지 제법 길게 적은 글이 날아갔다. 이것도 나의 잘못이다. 다시 적어본다. 돌대가리로 살기 힘들다.

고대 동아시아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살아가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배자가 등장했다. 작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갈 때는 가족 단위일 수 있지만, 이젠 그 정도의 작은 단위가 아닌 남들과 같이 살아가는 곳에선 어쩔 수 없이 법이 필요하고, 그 법을 유지할 권력이 필요했다. 당연히 지배자가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지배자는 처음엔 그저 힘이 쎈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힘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힘만으로 자기 ‘권력’의 ‘권위’를 정당화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천명’, 즉 하늘의 뜻에 따라서 지배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물론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했을지 모른다. 하늘의 뜻에 따라서 ‘천자’, 하늘의 아들로 있는 이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그들에게 조금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늘의 뜻, 즉 ‘있는 모든 것의 이치’, 도(道)와 리(理)를 알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당시 많은 이들은 그가 너무나 당연히 지배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한 그 권위를 정당하며, 정당한 권위의 정당한 권력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다면, 동아시아의 ‘유학’이란 철학도 그 시작부터 매우 정치적이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에게 양반이 천한 신분의 사람보다 더 탁월한 바로 그것은 그 보통적 이치를 그들만이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함으로 익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지배의 명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고대 헬라를 보자. 그들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 우주의 배후에 있는 어떤 질서, 보편 타당한 바로 그 질서가 궁금했다. 예를 들어, ‘로고스(logos)’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느껴지는 세상은 그때 그때 다르고 어느 정도 지속된다고 해도 영속할 것이라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감각의 세상이니 말이다. 헬라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무질서로 보이는 우주 가운데 어떤 질서, 즉 로고스가 있다고 보았다. 굳이 로고스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여도 우주의 참된 모습, 본질 등을 그들은 탐구해야 했다.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 감각의 세상 배후에 존재하는 그 보편적인 질서, 이치를 알고자 하였다. 언제 달라질지 사라질지 모르는 그러한 것이 사람의 이 무한해 보이는 앎의 욕구를 채울 수 없다고 보았다.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감각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것, 초감각적이며 절대 변하지 않는 어떤 영원한 것이어야만 했다. 탈레스가 구하고자 한 것도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한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이다. 처음엔 ‘사제’, 즉 종교인들이 우주에 숨은 이치를 해석해서 인민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종교인이 알려주는 그 신의 뜻은 좀 처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었다. 그때 그때 다른 것이었다. 신의 변덕스러운 심리에 의존한 것이었다. 사람은 이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이성으로 변덕스러운 우주 가운데 로고스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이 철학을 낳았다. 철학은 계시와 같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이성으로 우주의 진리, 즉 로고스에게로 가려는 것이다. 그 로고스를 이해하는 것이다. 계시와 같은 신비를 지우고 말이다.

플라톤은 감각의 세상 어디에서도 로고스를 찾을 수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영원한 진리를 가변적이고 변덕스러운 이 감각의 세상에선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감각 인식을 무시하면서 인간 지성 안으로 숨어 들어 버린다. 감각 없이 지성이 어떻게 진리를 인식하겠는가? 플라톤은 상기설을 이야기한다. 감각은 그저 유사품을 상기하게 하는 도움이 일 뿐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몸으로 여기 태어나기 전에 이데아의 세상에 있었고, 그때 본 것을 지금 기억해 내는 것이 철학이다. idein이라는 ‘보다’라는 뜻의 단어에서 나온 idea는 ‘본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이 몸에 들어오기 전에 본 것을 기억해내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다. 플라톤은 그 영원 불멸의 세상을 감각으로 도저히 안 되고, 현생의 인간이 할 것은 그를 상기하는 것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 인식을 긍정했다. 감각으로 영혼 외부의 것을 인식하고, 그것은 능동 지성이 추상하여 이런 저런 개별적인 차이들은 모두 지우고 온전한 개념만을 남겨 그것을 수동 지성에 둔다. 우리가 지금 양파를 보고 있다고 하자. 양파의 모양은 저마다 다 다르다. 그 다양한 차이들을 지우고 구체적인 어떤 양파가 아니지만 모든 양파들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어떤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은 상기해내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의 양파에 대한 경험들을 통하여 양파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양파라는 말을 들었을 머리 속에 떠오르는 바로 양파는 어떤 하나의 양파가 아니다. 양파를 양파로 만들어주는 양파의 보편적 본성을 사람은 자신의 이성만으로 충분히 얻을 있다고 보았다. 많은 경험하고 많이 추상하여 얻은 보편은 사람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보편이 인식의 대상으로 영혼 밖에 있다고 믿었다. 바로 그 영혼 밖에 있는 것도 영혼 안에 있는 것이 상응할 때, 참된 인식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참된 인식이란 영혼 안만의 몫도 아니고, 영혼 밖만의 몫도 아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되어 동화될 때 참된 인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내가 딸기를 떠올릴 때, 그 딸기에 대한 나의 생각과 그 생각에 상응하는 딸기가 영혼 밖에 있을 때, 딸기는 유의미한 말이 된다. 여기에서 유의미하다는 말은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말이다. 영혼 밖에 있는 것도 진짜이고 영혼 안에 그에 대한 생각도 진짜라는 말이다. 이렇게 두 가지가 진짜가 되어 만나는 그 영혼의 안과 밖의 일치가 진짜가 확인되며 동시에 영혼 밖이 나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온 순간이며, 동시에 영혼 안이 영혼 밖의 것을 잘 가져와 그것을 개념화한 순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화된 것, 우리 가운데 심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것은 그것에 준한 인식의 대상이 혼의 밖에 있다고 보았다.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검음'이란 색의 경우를 보자. "나의 연필심은 검다", "너의 잉크는 겁다"라고 할 때, 이 두 명제에서 서로 다른 주어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그 '검음'은 영혼 밖에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검음'은 '이 검음'이나 '저 검음'이 아닌 '검음'이다. '검음'이란 말을 들으면 우린 '이 검음'이나 '저 검음'을 생각하지 않고 '검음'을 생각한다. 그 말은 그 '검음'이 영혼 밖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중세의 실재론자들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보편 술어, 즉 여럿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그 보편의 의미 대상이 영혼 밖에 있다고 보았다.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 등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우린 사람이란 말을 알아듣고 머리 속에 사람이란 개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이란 말이 특정의 어떤 개인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보편적 술어도 그 술어에 준한 어떤 의미 대상이 영혼 밖에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보편도 감각의 대상은 아니다. 감각은 철저하게 개체만을 향한다.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은 느낄 수 있다. 사람 그 자체는 느껴짐의 대상이 아니다. 이 사람은 크게 웃는다. 저 사람은 수업 시간에 잠을 잔다. 그 사람은 수업 시간에 게임을 한다. 이와 같이 각각의 개인은 저마다 다 다른 나름의 차이가 있고,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느낌을 넘어서 이 모두는 사람이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 그 자체'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성의 몫이다. 이성이 각각의 서로 다른 다수의 감각 경험을 수용하여 그 가운데 어떤 고정된 본질적인 요소를 가려낸다. 바로 '추상'을 한다는 말이다. 이를 통화여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부분으로 '사람'이란 개념을 만들어낸다. 

플라톤은 감각을 거부하고 자기 영혼 안에서 영혼 밖의 원형에 대한 기억, '본 것', 즉 이데아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여 그 원형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그 그리움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려 노력했다. 이것이 어쩌면 그의 철학이다. 그 원형의 세상이 가장 잘 구현된 공간이 철학자가 왕으로 있는 나라일 것이다. 그의 <국가>와 <법률>의 논의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원형을 보고 데미우르고스는 우주를 만들어냈다. <티마이오스>의 논의다 그 원형은 그대로 완전하여 데미우르고스가 제작 행위의 원형으로 삼아야만 할 가치의 것이고, 그것을 본 사람은 그 기억에 따라서 그것으로 나아가야 할 존재다. 플라톤에게 철학하는 사람은 감각되지 않는 그 영원한 진리의 세상, 이데아의 세상을 알아내야 한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 기억해 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말'이다. 말은 감각적으로 물리적 공기를 진동하여 귀에 전달되지만, 말은 영혼 안의 생각을 외부로 드러내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그 무엇이다. 그 말을 통하여 상대방의 영혼으로 다가가 기억을 돕는다.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가운데 있는 그 원형에 대한 기억을 일깨운다. 기억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주, kosmos로 우주 가운데 질서, logos를 해석해내기 위해, 그것을 알아내고 진리의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플라톤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 자기 안에 이미 주어진 것을 기억해 내려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백지로 태어난다 생각했다. 인식할 가능성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그 가능성을 능동적으로 채워가면서 세상을 더 많이 알아간다. 그렇게 많은 경험과 능동적인 지성의 활동으로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 보편을 추상해 낸다고 한다. 추상으로 알게 된 보편은 기억해 낸 것이 아니다. 신적인 존재가 우리의 영혼 가운데 조명으로 새겨준 것도 아니다. 개인이 스스로의 지성, 그 지성의 힘으로 일구어낸 것이다.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본 것'의 원형으로 나의 밖에 있는 이데아계의 그것이다. 그 철학의 고향을 향하여 고향에서 추방된 존재가 그리움으로 자기 있어야할 곳으로 기억에 따라 다가가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감각은 방해다. 지성만으로 고향을 향해 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르다. 그에게 중심은 본 것이나 기억이 아니다. 그렇게 감각을 무시 하지 않는다. 플라톤에게 나는 곧 '혼'이다. '몸'은 나란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나란 존재에겐 감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나'는 혼과 몸의 합성이다. 혼만으로도 몸만으로도 나란 존재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몸으로 이룬 인식도 나란 존재의 인식이고 이성혼이 이룬 인식도 나란 존재의 인식이다. 나란 존재의 인식은 몸의 감각과 혼의 지성이 함께 이룬 것이다. 감각 수용은 거부하지 않는다. 변화 무쌍한 이 세상에 대한 흩어진 감각 경험, 어제와 오늘이 서로 다르게 느껴지는 이 현실의 감각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그 몸의 감각이 만든 그 흩어진 상들에서 지성은 어떤 고정된 무엇인가를 능동적으로 추려낸다. 그렇게 보편적인 개념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외부 대상에 대한 인식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감각도 있지만, 무엇보다 보편적인 개념, 참된 인식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지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같이 본 것이나 상기라는 지성이 아닌 능동적으로 인식하고 사유하는 지성, 스스로 보편적인 무엇인가를 추려내 혼 가운데 보관하는 지성이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람을 두고 이성적 동물이라 한 것은 모든 사람이 모두가 자신의 감각의 지성 혹은 이성으로 바로 이러한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지성으로 스스로 감각 세상 배후의 존재론적 근거이며 인식론적 근거인 그 로고스로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배후 무엇인가를 해석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세 철학자들은 조명과 같은 것의 도움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저 자기 지성이면 충분히 이 세상의 참된 모습을 해석해 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2019년 9월 광주시민자유대학의 중세철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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