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리가 그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신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라 무엇을 청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 그분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또한 그분께 청한 것들을 (이미)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16 누가 혹시 자기 형제가 죽을 정도는 아닌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께) 청하시오.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 그 죽을죄는 짓지 않은 이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죽을죄도 있습니다. 그런 죄에 대해서 청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 정도는 아닌 죄가 있습니다.
18 우리가 알다시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그를 지켜 주시니 악한 자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났지만,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0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시어 그 참되신 분을 알아보도록 하셨다는 것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은 참되신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어린 (친구) 여러분, 우상들을 조심하시오.
(<요한 1서> 5장 14-21절)
죄가 흔한 세상입니다. 언젠가 어디나 죄가 흔한 것이 또 세상입니다. 교회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차별이 있고 무시가 있습니다. 세상이라 함은 교회 밖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다는 그 세상은 아집과 이기심이 다스리는 곳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곳엔 곁으로는 하느님의 편에 선 자들이지만 속으로 여전히 자신의 편에 선 이들이 가득합니다. 한때 민주주의를 위하여 투신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 독재자의 편이 되고 또 스스로 권력을 누리기 위해 애쓰기만 하는 것을 우린 종종 봅니다. 아집과 이기심의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곁으로 보면 거룩한 모습이고 온갖 불의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자기 드러남에 치우친 이들도 어렵지 않게 봅니다. 역시나 아집과 이기심의 세상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입니다.
자기가 신으로 있는 자들입니다. 자기 욕심과 자기 드러남이 신이 된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신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신으로 모신 듯이 보이면 그것도 거룩해 보여 그렇게 애쓰는 사람 정도일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신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정말 신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우상입니다.
자기 자신이 우상인 이들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뿐 아니라, 이웃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기려고 하고 명령하려 하고 자기의 관점과 시선만이 정답이라며 강요합니다. 다름은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니 이웃과 더불어 있지 못합니다. 이웃은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른 다름을 가진 사람이니 말입니다. 나와 다른 종교일 수 있고 나와 다른 사상과 나와 다른 취향과 나와 다른 고향과 학력을 가진 사람일지 모릅니다. 분명 그렇게 다른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만 정답이라 고집하는 이가 어떻게 그 이웃을 만나겠습니까. 그런 이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저 자신의 답만을 고집하며 이웃을 낮추어 보려 할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말입니다. 이웃을 만나지 못하는 이, 자기를 내어줌으로 자기 아닌 이와 더불어 우리를 이루지 못하는 이, 그들의 공간엔 하느님도 머물 수 없습니다. 나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자기 내어줌으로 우리 가운데 영원한 삶을 그에겐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천국 가기 위한 자기 수단일 뿐이며, 이웃도 자기의 또 다른 이런저런 이유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영원한 삶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하느님의 품에 있지 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란 우상 속에서 홀로 외롭게 다투고 있는 서글픈 영혼일 뿐입니다.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 합니다. 자기 내어줌으로 자기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우리를 이루며 살라 합니다. 자기라는 우상에 빠져 살지 말라 합니다. 자기 내어줌으로 이웃과 더불어 우리를 이룬 바로 그곳에 하느님께서도 이미 찾아와 더불어 있다 합니다. 돌아봅시다. '나'는 혹시 '나'라는 우상에 빠져 남들을 쉽게 판단하고 조롱하고 무시하지 않았나 돌아봅니다. 더불어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 돌아봄이 희망의 첫걸음이라 믿어 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1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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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권은 저의 칼럼 모음집과 묵상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 두 권의 책은 저의 저서입니다. 더불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대칠, <복음이 전하는 더불어 삶의 행복> (이 책은 링크된 '부크크 서점'과 '예스 24' 그리고 '교보' 사이트에서만 구매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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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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