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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메모

중세의 철학과 지금의 나 2019년 10월 29일 - 왜 하필 성자인가?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0. 29.

중세 사람들은 이유가 참 궁금했다. 삼위일체라면 동일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있다면 왜 굳이 성자의 육화를 통하여 성자에 의하여 구원 사업이 이루어진 것일까? 오세르의 윌리엄은 <명제집에 대한 황금 대전(Summa Aurea)>에서 이 문제를 묻는다. 왜일까? 

윌리엄은 요한 복음서를 보라 한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성자로 인하여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 그를 통하지 않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요한 복음서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이 문제와 무슨 소용인가? 생각해 보자. 성자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은 창조 이후 재창조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선 처음과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처음 창조가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재창조에서도 모든 이들은 성자를 통하여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윌리엄의 생각이다. 이어서 두번째 이유는 성자가 말씀, 즉 라틴어로 verbum이란 사실이다. 성자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그 말의 주인과 그 말의 의지가 드러난다. 따라서 성자는 말의 주인인 성부와 그 말의 의지인 성령을 드러낸다. 성자의 육화는 바로 성부와 성령을 이와 같이 드려낸다. 세번째는 성부의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다. 네번째는 성부인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부는 자신의 외아들을 가장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내어 놓음을 보인 것이다. 다섯번째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매우 신학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철학적이다. 중세인들이 생각한 verbuma을 이해할 수 있다. 말은 곧 앎과 관련된다. 개념이 verbum이 될 수 있다. 앎이 아니고 개념이 아닌 것이 어떻게 verbum이 되겠는가? 뜻(심적 개념) 없는 말을 무의미한 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그 유의미한 소리는 그 자체로 앎의 주체와 그 주체가 언어 활동을 의지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앎과 관련된 이성은 무엇인가를 바라는 의지와 따로 있지 않고 항상 더불어 존재한다. 그 기능 자체가 더불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더불어 있음의 주체적 장이 바로 존재다. 여기에서 주체의 존재가 성부를 의미하며, 앎의 행위, 즉 이성적 행위가 성자를 의미하며, 의지의 행위가 성령을 의미한다. 

그냥 바란다는 것은 무엇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의지다. 의지가 무엇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무엇에 대한 사고가 앞서 있어야 한다. 그때 의지도 유의미한 의지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의지는 이성의 사고 없이 유의미한 무엇으로 드러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성령의 육화가 우선되기 보다는 성령의 육화가 우선되어야 한다. 앎, 말씀,. 이성이 우선됨으로 유의미한 의지를 더불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체로의 성부는 이 모든 활동의 토대로 당연히 주워져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성자가 육화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적절하다. 의미론적으로 말이다. 물론 재창조라는 존재신학적 측면에서도 참 재미난 근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의 독서는 오세르의 윌리엄(Guillaume d'Auxerre)의 Summa aurea Lec.3, trac.1이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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