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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메모

철학, 철학사 그리고 나는...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2. 19.

한국에서 철학 공부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많은 경우 철학사를 열심히 공부한다. 철학사를 만드는 사람들도 결국 이미 있는 철학사의 사관도 그리 다르지 않은 입장에서 철학사를 적어간다. 그냥 이미 있는 생각의 한국어 버전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왜일까? 박동환의 <X의 존재론>에 상식 같은 이야기가 있다. 철학사를 읽는다고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맞는 말이다. 철학사를 읽는 것은 그냥 철학사를 쓴 이의 사관에 의하여 쓰인 하나의 상품을 소비하는 행위다. 그것이 생산의 행위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 생산을 철학이라 부르기는 힘들다. 철학은 철학사를 쓰는 행위다. 읽는 행위가 아니다. 쓴다는 것을 질송이나 들뢰즈 혹은 플라쉬와 같은 이들의 철학사를 한국 버전으로 만들어낸다는 말이 아니다. 질송은 자신의 신념 속에서 철학사를 구성했다. 많은 부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플라쉬도 그의 철학이 과거를 돌아보는 시선이 되고 그 시선 속에서 보인 것으로 철학사를 구성했다. 한국엔 왜 외국 철학의 한국어 버전이 있지만 한국인이 쓴 서구 철학의 고유한 버전이 없을까? 철학의 부재다. 철학이 존재하는 곳에 철학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성립한다. 외국 유명 학자의 시선에 감탄하면서 독후감을 쓰는 것이 철학사가 아니라 논문도 아니다.
나는 철학사를 쓰고 싶지만 그 철학사는 나의 철학과 나의 시선의 반영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한국인으로 서구 중세의 생각들을 볼 것이다. 당연히 남의 역사이고 남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남이기에 볼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있는 것도 있으며, 나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 나의 철학 속에서 나만의 고유한 무엇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나의 옆에 두고 읽는 박동환의 글 가운데 한 구절에 잡혀 이런 이야기를 적는다. 그냥...

나는 플라쉬나 리베라의 아류가 되기 위해 철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 남들이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시선과 나의 시선에서 보인 것이 설사 플라쉬나 리베라와 달라도 그들과 다투면서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철학사를 쓴다. 나는 대가들의 철학사를 읽고 독후감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나는 나다.

2017 10 14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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