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우리 사회의 불가촉천민이 어떤 이들인지 숙제를 낸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참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모두에게 평등을 가르쳐야 할 교사가 학생들에게 우리 사회의 '불가촉천민'을 조사해보란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아픈 일인지요. 혹시나 그 숙제를 해야 하는 학생 가운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가촉천민으로 적어야 하는 이들이 있진 않았을까요.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그리 큰 대접을 받지 않은 일을 하니 말입니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많은 이들이 그런 직업과 그런 소득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도 차별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아프고 슬픈 죄업의 현실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런 잔인한 숙제를 아이들에게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숙제를 통하여 역으로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려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참 아프고 슬픈 숙제입니다.
우리 사회엔 건들려도 안 될 만큼 역겨운 불가촉천민이 없어야 합니다. 모두 평등해야 합니다. 그런 계층이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의 '악업'입니다. 그들의 게으름이나 그들의 무지 탓이 아닙니다. 아무리 게으르고 무지해도 그들을 차별하지 말하야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아픔입니다. 조금 천천히 살아가도 조금 덜 알아도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그들 불행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사회를 파괴하진 않으니 말입니다.
정말 사라져야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차갑게 잔인하며 슬기롭지 않아도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으로 흔히 이야기하는 갑질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권력자의 자식으로 너무나 당당한 악을 일상으로 살아가며 언론에 등장하는 이들을 우린 심심하지 않게 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정말 사라져야 할 불가촉천민은 바로 그러한 이들입니다. 혹시나 그들과 같은 부자가 되려는 이들이 생길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모든 형제들>의 한 구절을 읽어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예수 시대의 사회에서 ‘이웃’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옆집 사람을 말했다... 사마리아인은 당대 일부 유대인들에게 멸시의 대상이자 불결한 존재로 취급받았고,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에 포함되지 않았다. 유대인이었던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꾼 셈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누가 우리 이웃인지를 자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가까이 지낼 것을, 즉 서로의 이웃이 되라고 권고하신 것이다."(80-81항)
이웃으로 포함되지도 못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불결한 존재, 인도식의 표현으로 하자면 불가촉천민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바로 그러한 이들을 이웃으로 안아주신 분이십니다. 사람을 나누는 이러한 계급의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알던 이들에게 일종의 혁명이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을 우리에게 던진 것입니다. 이웃도 안 될 이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라져야 할 이들은 아집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이들입니다. 그들이 정말 우리 사회의 암과 같은 존재입니다. 천천히 살아간다고 그들이 우리 사회의 암이 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하지 않으며 조금 덜 배운 이들이 우리 사회의 암과 같은 존재로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배운 이들이 더 교만스럽게 사람들 무시하며 이 사회를 나누고 서로 다투게 하고 싸우게 하며 그 가운데 자신의 이득을 챙겨 왔습니다.
내가 누구의 이웃인지 생각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며 서로가 서로의 형제자매이며 한 가족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정말 불결한 것은 우리의 아집과 이기심입니다. 그 아집과 이기심의 넘어 우리가 다가가야 하는 이웃, 그 이웃을 나누지 맙시다. 우리 모두가 한 형제자매이니까요.
예수께서는 지금, 어쩌면 우리의 양심이 지금,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고 누가 나의 형제자매인가요? 혹시나 나 역시 이 세상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누릴 것인가? 이 것을 생각하기 전에 누가 나의 이웃인지 스스로 반성하며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불결한 아집과 이기심이 세상을 나누며 흩어지게 하고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1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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