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착각
‘철학(哲學, philosophia)’은 삶을 바꾸지 못한다. 철학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삶은 바뀌지 않는다. 사회적 혼란은 철학 지식의 부재로 일어나지 않는다. 철학을 아무리 많이 가르치고 아무리 많이 주입해도 사회적 혼란은 해결되지 않는다. 철학이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고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란 생각은 하지 말자. 그러지 못한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철학이든 신학이든 그 지식이 우리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종종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부조리들이 ‘철학의 부재(不在)’ 때문이라 생각한다. 틀린 말이다. 사회적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리 많은 철학적 지식을 가르치고 주입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철학책이 아무리 많이 번역되고 연구되고 논문이 수없이 생산되어도 이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되지 않고 내 삶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불만은 해결되지 않는다. 잠시 무엇인가 큰 깨우침을 얻은 듯하지만 큰 착각이다. 돌아보면 변화된 것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그 깨우침의 주체인 자신도 달라진 것이 없다. 왜냐하면 철학 지식이란 원래 삶과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킨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교리를 많이 가르치면 가톨릭 신자들의 사회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커질 것이란 생각도 사실 틀린 말이다. 알아도 바라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몰라서 악한 것이 아니다. 몰라서 악한 이는 알아도 악하다.
칸트의 철학을 안다고 칸트의 철학이 이야기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노자의 철학을 안다 해도 노자의 철학을 삶으로 드러나지 않듯이 말이다. 칸트의 철학을 알아도 칸트가 이야기하는 악을 행하며 산다. 노자의 철학을 안다 해도 마찬가지다. 노자가 분노할 삶을 살아간다. 많이 배우지 못한 이에 대한 조롱(嘲弄)과 무시(無視)가 나쁘다는 것을 알아도 이미 그 앎이 그의 삶을 다르게 하지 못한다. 배우지 못한 이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일상은 그대로 그에게 일상으로 머문다.
한마디로 철학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철학 강의를 듣고 철학책을 읽어도 삶은 그대로라는 말이다. 잠시 무엇인가 변화된 것이 느끼지만 말이다. 그것은 단지 큰 착각일 뿐이며, 그 근본은 그대로이다.
앎으로의 철학은 그와 같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판별하는 능력이 있다고 좋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도둑도 자신의 삶을 나쁜 삶이란 것을 판별할 능력이 있다. 단지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앎이 삶과 구분되고 있을 뿐이다. 그 앎이 삶이 되지 못한 것이다. 앎은 삶이 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앎은 그저 뇌 속 머무르는 관념의 한 조각일 뿐이다.
철학이 유의미한 무엇이 되기 위해 그 철학은 삶 속 ‘뜻’을 품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저 알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삶 속 무엇이 되어 있어야 한다. 뜻을 품은 무엇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철학은 그저 무력한 그 무엇이고, 경우에 따라선 남들 모르는 것을 더 안다는 지적 교만과 우월감의 수단이 될 뿐이다. 차라리 없어도 그만인 무엇이 될 뿐이다. 철학이 우리 삶 속 ‘뜻’을 품은 무엇이 되기 위해 철학은 ‘앎’이 아니라 ‘철학함’이 되어야 한다. 철학은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한 삶을 향한 애씀이 되어야 한다. 작은 철학의 지식이라도 지적 허영이나 교만 그리고 우월감에 쓸 것이 아니라, 삶 속 작은 행함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작은 철학의 지식이라도 타자를 함부로 판단하고 배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홀로 있음을 돌아보며 어찌 더불어 있을지 궁리하여 실천하는 애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철학은 그러지 못했다. 그것을 기대하지도 못했다. 철학은 우리를 계몽해주길 기대했다. 철학자는 우리를 바꾸어주길 기대했다. 철학도 철학자도 그럴 수 없다. 철학과 철학자가 주체가 되어 변화를 이끄는 그러한 삶의 변화는 자기가 스스로 주체가 된 변화가 아니기에 곧 무너지고 사라진다. 결국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계몽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철학과 철학자의 도움으로 쉼 없이 자신의 지금 여기 있음에 안주하지 않고 이 자리를 돌아보고 돌아봄으로 쉼 없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 새로 태어남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삶의 주체인 나가 되어야 한다.
철학과 철학자가 자기 삶을 바꿀 무엇이길 기대할 때 사람들은 철학자가 자신보다 더 똑똑하길 희망한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그 똑똑함의 기준은 수능 성적이다. 수능을 잘 쳐야 한다. 그리고 성적 높은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대학교에서 공부해야 한다. 그때서야 그에게 귀를 연다. 그리고 그 똑똑함을 들으며 자신도 그와 같이 되어가는 줄 착각한다. 큰 착각이다. 차라리 학연과 지연 그리고 혈연 사회의 지독한 부조리에 아파하고 아파한 고난의 주체가 우리 삶에 유익한 참고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바꾸어줄 똑똑한 존재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똑똑한 철학으로 우리 삶을 계몽하길 바라는 민중은 결국 자기 자신과 같은 아픔에 아파하는 이의 철학에서 멀리 떨어져 똑똑한 이의 똑똑함에 취해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철학은 아픈 현실을 모르는 지식이기에 결국 우리 삶을 바꾸지 못한다. 필요 없는 지식이다. 그냥 지적 허영의 일부일 뿐이다.
큰 착각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유대칠
2021 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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