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변화한다. 한 사람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길지 않지만 그래서 그렇게 큰 변화를 경험하지 힘들 수 있지만, 세상은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당연히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던 세상은 이제 없다. 적어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다. 법적으로 노예제도를 가진 나라도 없다. 왕이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법적 근거를 가진 나라도 없다. 부조리를 이용해서 다양한 악을 행사한다 해도 적어도 법적으로 대부분의 나라는 평등과 평화를 지향한다. 100년 보다 조금 더 과거, 이 땅의 민중은 신분제 철폐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30여 년 전까지 우린 국민 각자에게 한 표 권리를 달라 목숨 걸고 싸웠다. 다른 부조리들은 더 심해지고 악화되어도 적어도 이제 신분제나 선거권을 두고 싸우진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변화했다. 느끼고 살기는 거의 변화하지 않아 보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참 많이 변해있다. 과거 대통령 욕을 해도 잡혀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대통령 욕을 하고 다닌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수도 있다. 세상은 변했다. 누군가의 고상한 철학이 이 변화를 이끌지 않았다. 그냥 민중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매우 다양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를 변화시키고 있다. 진보를 이야기하거나 역사의 답을 안다는 지식인의 눈에 답답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민중의 속도로 변화하는 것이 답이란 생각을 한다
동학농민혁명도 누군가의 이론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시대의 부조리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일어난 것이지 누군가의 이론에 매료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다. 3.1혁명도 마찬가지다. 그 이후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결국인 부조리에 분노한 민중의 힘으로 변화되었다. 많은 부분 여전히 답답한 모습이 각자의 눈에 보일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그 속도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민중 스스로 말이다.
철학이나 신학은 고상하게 민중을 감상하며 이래라 저래라 이야기한다. 때론 자신들이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훈계질을 즐긴다. 그러나 이 땅 역사에서 철학이나 신학이 민중에게 진정한 의미의 희망으로 다가간 적이 있었던가. 대학의 철학과가 모두 다 사라져도 민중이 크게 놀라지 않은 것은 철학과의 철학이 민중에겐 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성직자나 목회자가 되는 자격시험 학원의 과목 같은 역할을 벗어나 제대로 이 땅 민중의 편에서 울어 보았는가. 잘 모르겠다. 저마다 복음으로 돌아가자 한다. 공허한 이야기다. 복음으로 돌아갔는지 민중은 모르지만 적어도 민중에게 온 적도 돌아온 적도 없어 보인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유명 철학자들의 철학을 아무리 연구해도 과연 우리 사회에 무슨 변화가 있고 우리 민중에게 어떤 쓸모가 있겠는가.
철학은 이제 스스로의 쓸모를 새롭게 규정하고 태어나야 한다. 신학도 다르지 않다. 철학도 신학도 민중의 힘겨운 삶을 떠나 자신들끼리 모여 이루는 고상한 말의 잔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철학 한 줄 모르고 신학 한 줄 몰라도 전태일은 이 땅에 뜻을 이루었다. 고상한 서구의 말로 민중을 계몽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민중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문익환은 이 땅에 뜻을 이루었다. 고상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분노의 외침으로 남들 보라는 학위 하나 없이도 함석헌은 이 땅에 뜻을 이루었다. 굳이 이들 말고도 종교도 철학도 없이 그저 자신이 더불어 있는 그 자리에서 많은 이들이 뜻을 이루며 살다 죽어갔다. 1980년 5.18을 보자. 그 가운데 가장 낮고 낮은 자리, 성매매 여성들도 자발적으로 시민을 위하여 헌혈을 하고 시위에 참여하고 사람을 숨겨주고 물과 주먹밥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종교도 없고 철학도 없고 심지어 온갖 사회적 편견 속에서 아파하던 이들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이 땅에 뜻을 일구었다. 고난자들은 고난의 아픔을 안다. 동학에서 동학의 깊은 철학이 그들을 하나로 더불어 있게 한 것이 아니다. 고상한 언어가 그들을 하나로 모은 것이 아니다. 고난의 아픔을 나눈 이들은 서로의 고난, 그 아픔을 안다. 그래서 그 고난이 남의 아픔이 아니다. 그러니 더불어 있게 된다. 스스로도 낮은 자이면서 낮은 자를 위하여 일어나 낮은 자들의 평등을 이야기한다. 죽어가더라도 그렇게 더불어 산다. 그렇게 민중은 이 땅의 역사를 일구어왔다.
이제 철학도 신학도 고상한 그 언어 유희의 장에서 스스로 답을 안다며 민중을 계명하겠다는 자리에서 내려와 우선 더불어 울어야 한다. 그때 이 땅의 철학과 신학도 이 땅 민중의 언어로 그 고난을 닦아줄 손수건 같은 철학과 신학을 일굴 것이다.
유대칠
2021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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