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집'에서 벗어난다는 것, 그것은 참된 자유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족쇄가 어쩌면 아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만이 답이고 나만이 위에 있고 나만이 앞서야 한다는 생각, 그것으로 부터 자유롭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오랜 수행을 한 수도자로 자신만이 답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자기 수행만이 답이고 자기가 더 많이 깨우쳤고 자기가 더 많이 안다는 식으로 말이죠. 오랜 시간 철학을 공부한 이도 신학을 공부한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참으로 건방진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아집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몰라도 아집에서 벗어나진 못한 것이죠.
마음 없이 어떤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불교 교리가 있습니다. 바로 '유식사상'(唯識思想)입니다. 우리말로 조금 풀어 설명하면 '오직(唯) 의식(識)' 뿐 뜻이 됩니다. 이 말은 원래 '유식무경'(唯識無境) 혹은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말의 줄인 말입니다. 만법유식이란 모든 형상은 오직 마음의 작용이란 뜻이기에 사실 유식이란 두 글자로 그 원래 뜻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줄인 말 같습니다. 종종 불교를 이야기하며 사용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도 유식사상과 관련된 말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지어낸 것이란 말이니 말입니다. 유식사상을 완성한 이는 4세기 인도 간다라의 승려 세친(世親, Vasubandhu, 316∼396)입니다. 그가 쓴 『유식삼십론송(唯識三十論頌)』은 유식사상의 정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유식삼십론송』은 세상의 모든 것은 가설(假設)된 것, 즉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말로 논의를 시작합니다. 유식사상에 의하면 사실 그렇게 충격적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의식, 즉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난 것일 뿐인데, 그것이 마치 객관적인 절대 진리인 듯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되니 말입니다. 어느 종교는 어찌해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종교는 또 어찌해야 한다고 하고,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서로가 서로를 오답이라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만 정답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식사상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이 서로의 아집 속에서 남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어느 수도자가 온 평생 마쳐 깨우친 것도 잔인하게 이야기하면 그저 그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그의 깨우침일 뿐 그것이 타인에겐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해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것이 정답이니 그 정답만을 강요하며 그것이 정의와 진리를 위한 싸움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아집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선이니 악이니 하는 모든 것들도 결국 아집의 결과물입니다. 결국 한 개인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절대 진리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아집이 그에게도 모두에게도 독이 됩니다.
아집에서 벗어나면 나의 답만을 고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나의 답만이 정답이란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니 말입니다. 나와 완전히 다른 것에 동의하고 함께 하지 않아도 그의 존재 자체를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함부로 하는 순간 나는 그에게 악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서로의 차이로 서로에게 벽을 만들지 않고 서로 다른 여럿이 서로 다른 채로 서로가 서로에게 응원할 수 있는 벗이 되기 위해선 아집에서 벗어나야 할 듯합니다. 나만의 있음, 나 홀로 있음만을 고집하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더불어 있음이란 서로 다른 답들이 어우러져 있음입니다. 더불어 있음이란 서로 다른 답이 하나로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답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어우러져 있음입니다. 서로 다른 답으로 하나의 아픔에 대하여 고민하고 때론 연대하며 서로 다른 생각과 방식으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될 필요는 없겠지요. 나의 우주는 나의 의식의 산물이며 그 우주가 그리 귀하다면 나 아닌 이의 우주 역시 나에게 귀히 대접받아야 합니다. 그때 나의 우주도 온전히 그에게 귀한 것이니 말입니다.
아집에서 벗어날 때 나의 우주도 온전히 귀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엔 그 우주에서조차 자유로워져지며 열반에 이르게 되겠지요.
부처님 오신 날... 유식 사상에 대하여 저의 마음으로 돌아보았습니다.
2021 05 09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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