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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나는 나의 두개골 가운데 바로 이 뇌이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1. 8. 11.

뇌(Brain)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우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영혼이 생각한다고 믿어왔죠. 양심도 영혼의 몫이며 육체의 몫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선하면 육체는 영혼의 지시에 따라서 선한 행동을 한다고 믿었죠. 육체의 최선은 영혼을 말 잘 따르는 것이고, 우린 영혼을 선하게 유지 혹은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나 영혼이 육체를 따르게 되면 감각의 기쁨에 빠져 타락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아주 많은 종교와 철학이 리를 당연한 것으로 이해했다. 

요즘 과거에 비하여 조금은 쉽게 정신과의원 혹은 병원을 찾을 수 있다. 그 만큼 과거에 비하여 많은 이들이 마음의 아픔을 병원에서 의학적으로 치료받고 있단 말이다. 마음의 아픔. 즉 영혼의 상처를 어떻게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 영혼 그 자체는 물리나 화학의 법칙을 벗어나 있는 것인데 말이다. 약을 먹어 마음의 아픔을 덜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 혹은 영혼이 물리와 화학의 법칙 아래 있단 말이 된다. 팔이 부러지면 의학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수술을 받아야 하고 수술의 효과와 부작용을 막기 위해 약을 먹기도 한다. 팔이 부러진 사람에게 정신력으로 이기라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말이 팔 치료 자체에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순간 위로가 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말로 인하여 팔이 치료되어 붙진 않기 때문이다. 부러진 팔 엔 물리적인 혹은 감각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의학적 치료가 필수적이다. 그러면 영혼 혹은 마음, 즉 심리는 어떠할까?

우울증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의 그 아픔이 그저 비물질적인 영혼이나 심리의 몫이라면 사실 물질적인 약으로 치료 할 수 없다. 그 원인이 비물질적인 것이라면 비물질적인 어떤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비물질적인 치료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지만 말이다. 브래들리 피터슨 남캘리포니아 의과대학 소아과 및 정신과 교수는 우울증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의 뇌구조가 우울증이 없는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우울증으로 힘든 이들은 대뇌피질이 두꺼워지는 현상이 있다. 우울 증상을 줄이기 위하여 보상적 신경 가소 반응이 일어나 대뇌피질이 두꺼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적절한 약물 치료를 통하여 우울증을 치료해가면 서서히 대뇌피질의 두께도 다른 이들의 수준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우울'이란 뇌의 어떤 현상이며, 그 현상이 일어날 때 물리적 존재인 뇌의 물리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울이란 뇌의 어떤 물리적 현상의 명칭이다. 그러면 그 물리적 현상을 제자리로 돌리는 물리적 처방에 의하여 뇌는 다시 정상이 될 수 있다. 조금 다른 비유이지만 스스로 진화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물리적 존재인 집이 있다고 하자. 그 집이 외부의 충격으로 일정 부분 순상을 입게 되고 이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다른 곳의 벽돌들을 이동하여 부서진 곳의 벽돌을 더 두껍게 하는 것이다. 우울이란 이 경우 부서진 집과 같은 물리적 현상의 이름일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이 양심이 물리적 존재의 뇌의 어떤 기능이라면, 뇌의 그 기능이나 그 기능을 담당한 부분이 사라진다면 그는 양심이 없게 된다. 우린 이를 반사회적 인격 장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내 두개골 안에 든 바로 이 뇌다. 뇌의 한 부분이 송과선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과 멜라토닌으로 우린 감정과 기쁨 등을 느끼고 또 편한 잠을 잔다. 세로토닌에 문제가 생겨 분비가 줄어들면 우울증이 시작된다. 세로토닌이 줄어들면 멜라토닌도 줄어든다. 세로토닌이 멜로토닌의 전구체이니 말이다. 우울이 불면과 연결되는 것도 이와 같이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혹은 의학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은 이를 물리적으로 서서히 관찰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뇌에 대한 이야기한 신비들이 현실적으로 과학의 영역 속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지는 지금, 우린 뇌에 대한 이러한 논의를 무시하고 철학을 시도하긴 어려울지 모른다. 아직도 과거 원시적 사회의 합리적으로 21세기의 지금을 설득할 순 없을 것이니 말이다. 더불어 있음의 철학 역시 뇌에 대한 관심과 논의의 이어짐을 매우 중시한다. 지금 이 순간의 철학이기 위해서 말이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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