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불어존재론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더불어 있음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1. 8. 22.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1947~ )는 현대 철학자다. 진짜 현대 철학자다. 유대칠처럼 지금도 살아있는 철학자니 말이다. 그런데 유대칠은 조금 많이 덜 유명하고 이 분은 조금 많이 유명하다. 우리에겐 아직도 그렇게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뭐 모른다고 크게 잘못한 것은 아니고 부끄러울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가 '현대철학'이라 부르며 공부해도 대부분은 이미 죽은 철학자들의 철학을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살아있는 철학자의 철학은 아직도 살아 역동적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의 철학이라 그럴 것이다. 예를 들어, 유대칠의 철학은 아직도 역동적으로 완성되어가는 중이다. 아직 유대칠도 유대칠의 철학이 어떻게 완성되어갈지 모르는데 어떻게 유대칠의 철학을 정리할 수 있을까. 그러니 지금 살아있는 철학자의 철학을 전공하기는 힘든 면이 있다. 물론 살아있는 철학자의 철학을 깊이 연구하고 전공하는 분들도 있다. 단지 일반화되긴 이런 점에서 어려울 수 있다 이 정도 이해해주시면 되겠다. 지금 살아서 철학하는 이들의 철학적 작업을 보면 지금 철학하는 이들이 고민하는 문제, 그 문제가 되는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주요한 것이 바로 환경이다. 환경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철학자 역시 환경 문제에 대하여 오랜 시간 관심을 가지고 철학을 일구어왔다. 근래엔 가톨릭 교회도 공개적으로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자기 소리를 내고 있다. 이미 오랜 시간 많은 시민 단체와 철학자들이 문제를 두고 심각하고 고민하고 분노하던 문제인데 지금이라도 종교가 공개적으로 참여하니 참 다양이다 싶다. 그런데 이미 말했지만, 이미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환경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한국에도 얼마 전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시죠. 한국의 환경 운동 역사에 있어 매우 소중한 '녹색평론' 사무실은 제가 대학을 다니고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엔 대구 범어동에 있었다. 수성경찰서 옆에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헌책방이 있어 몇 년 전 찾아가 본 적이 있었다. 아직 환경에 대하여 이 땅에 제대로 된 신학도 철학이 익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조금 더 오래 우리와 더불어 있으셨으면 저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참 많이 아쉽다. 유럽의 철학계에서 환경에 대한 문제는 이미 뜨거운 화두다. 저의 머리에도 몇 명의 철학자들이 떠오른다. 시간이 허락되면 한 명씩 소개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다. 소개는 그분들을 깊이 연구하신 분들이 저보다 더 많이 더 깊이 하실 것이니 말이다. 저는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다 정도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 싶다. 

가톨릭 교회가 환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크게 체계화된 학적인 성과들은 그 보다 앞서 연구해온 철학의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환경 문제를 종교를 넘어 종교 없는 이들에게도 전달되어야하는 문제인데 종교 없는 이들에겐 종교의 언어와 신앙이 아닌 이성에 근거하여 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환경에 있어 철학의 역할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정말 사람만이 홀로 있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 아닌 것들과의 더불어 있음에 대한 철학이 단단한 설득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할 시간이니 말이다. 저도 저의 자리에서 나름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 

환경을 고민하면서 저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 바로 라투르다. 

라투르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사람만으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이 물음은 아주 중요한 물음이다. 사람만 홀로 살아가는 곳이 사회인가?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공간에 '사람 아닌 것'은 어떤 힘도 없는가.

오캄연구소에 출근하면 연구소 탁자 위 화분에 심겨진 두 녀석을 몇 분 동안 그냥 보고 있는다. 연구소가 문을 열자 '도서출판 길'에서 화분과 수 십 권의 책을 연구소에 기증해 주셨다. ㅎㅎ 오셔서 거하게 식사도 대접해주시고 말이다. 이런 사연들이 이미 그 두 녀석에게 녹아들어 가 있다. 거기에 두 녀석 가운데 한 녀석이 죽어가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죽어 가지도 않고 서서히 살아 힘을 내고 있다. 이 모습도 너무 좋다. 그렇게 한 동안 본다. 그리고 나의 집 나의 서재엔 삼촌이 주신 '난'이 있다. 10년 이상 같이 살고 있는 친구다. 지금 사는 마을에 이사 오면서 받았으니 정말 오랜 시간 함께 한 친구다. 이번 이사를 오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갑자기 죽어가는데... 지금은 나의 첵방에 옮겨 두었다. 그러니 다시 생명을 얻어가고 있다. 이 녀석을 그냥 멍하게 바라보며 명상을 한다. 즉 이 녀석은 나의 명상 친구다. 그냥 수동적으로 놓여있는 물건이 아니라 나의 친구다. 그뿐인가.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하는 만년필도 그렇다. 아직도 원고의 시작은 그 만년필로 한다. 그리고 친구가 직접 만들어진 필통과 친구에게 선물 받은 유리 문진도 그렇다. 그냥 무기력하게 있는 물건 그 이상이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저에게 의미를 가진 벗이다. 또 고마운 분이 선물해주신 노트북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느 하나 빠짐없이 사연 담긴 책들도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은 그냥 무력하게 저의 책장과 연구실에 놓인 것이 아니다. 비록 사람이 아니지만 이들은 저에게 소중한 그 무엇이다. 저와 더불어 있는 그 무엇이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더불어 있음을 우린 철학의 주제로 삼지 않았다. 대체로 그냥 사람 중심이었다. '더불어 있음'을 고민한다 해도 항상 '사람과의 더불어 있음'뿐이었고, 그것도 결국은 자기 자신의 '홀로 있음' 중심에서 모든 것을 생각했다. 인간 중심이었단 말이다. '사람 아닌 것'은 그저 버려도 그만인 그 무엇이었고, 사람이라 해도 자기 보다 힘없고 어리고 생각과 종교가 다르면 그저 다 철저히 대상화해 버리곤 했다. 마치 무기력한 물건처럼 그들을 구경할 그 무엇이거나 다스릴 그 무엇이거나 그렇게 취급했다. 이 가운데 무엇이 되든 결국 홀로 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겐 대상일 뿐이다. 그렇게 사람만이 홀로 있고, 자기 자신만이 홀로 왕이 되어 있었던 것이 우리의 지난 모습이다. 그러고 싶어 했다. 다스리는 자가 되고 싶다. 이런 세계관에서 사람도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지고 우주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으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철학자 라투르는 우리에게 정말 우리의 사회는 사람만으로 이루어져있는지 묻는다. 이제까지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무시했을 뿐, 사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더불어 있음, 즉 '이질적인 더불어 있음'은 항상 있어 왔다. 학교 앞 과속 방지턱은 무력하게 그냥 수동적으로 있지 않고 과속 차량의 속도를 낮추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 분명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통경찰이 그 자리에 서서 직접 감시하지 않아도 과속 방지턱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유럽의 근대, 즉 우리가 근대인이라고 하면 우주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고 '주관'인 '사람'과 '객관'인 '사람이 아닌 것'을 구분하였다고 한다. '사람'만이 능동적이고 '사람 아닌 것'은 수동적인 존재이며, 더 엄밀하게는 무력하게 우리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존재일 뿐 사회의 일원으로 능동적으로 자기 몫을 하는 존재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일까? 정말 우주는 그렇게 주관(사람)과 객관(사람 아닌 것)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일까? 사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항상 '사람 아닌 것'의 더불어 있음 가운데 있어 왔고 '사람 아닌 것'은 우리 가운데 능동적으로 자기 몫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죠. 제 방을 채우고 있는 '사람 아닌 친구'들이 저에게 무력하게 그냥 죽어 있는 물건이 아니듯이 말이다. 

사람조차 자기보다 나약하고 어리고 사상과 종교가 다른 이들이라면 너무나 쉽게 대상화해버리는 이들에게 '사람 아닌 것'은 어쩌면 그저 무력하게 놓인 '물건'일 뿐 일지 모른다. 함부로 해도 그만인 그 무엇, 우리 가운데 무력한 그 무엇 말이다. 어쩌면 그들이 능동적으로 우리 삶에 한몫을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정말 제대로 된 환경에 대한 철학은 바로 이러한 태도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명이 있든 없든 '사람 아닌 것'도 우리에게 벗이며 능동적으로 우리 가운데 자기 몫을 하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사는 마을 옆을 흐르는 금호강은 무력하지 않다. 수많은 이들의 벗이며, 그 가운데 많은 문화가 이루어져왔다. 내가 사는 마을 뒤 와룡산은 그냥 무력하지 않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용이 하늘에 이르지 못하고 누웠다는 사연을 간직하고 수많은 나무와 동식물 그리고 사람들에게 소중한 벗이다. 죽이며 죽어지는 그런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우린 한 번도 '사람'만으로 살아온 적이 없으며, 항상 '사람 아닌 것'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것, 잊지 말아야겠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실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 혹은 국민은행 96677343443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위의 두 권은 저의 칼럼 모음집과 묵상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 두 권의 책은 저의 저서입니다. 더불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대칠, <복음이 전하는 더불어 삶의 행복> (이 책은 링크된 '부크크 서점'과 '예스 24' 그리고 '교보' 사이트에서만 구매 가능합니다.)

www.bookk.co.kr/book/view/94794

 

복음이 전하는 더불어 삶의 행복

홀로 외로운 시대, 홀로 더 많은 것을 누리며 불행한 시대, 정말 제대로 행복한 것을 무엇인가를 예수의 <주님의 기도>와 행복과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묵상한 묵상 모임집이다. 더불어 있음의

www.bookk.co.kr


유대칠, <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www.bookk.co.kr/book/view/92628

 

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모두가 홀로 누리며 홀로 높아지려는 시대, 그 아집으로 인하여 수많은 이들이 아프고 힘든 시대, 참된 더불어 행복하게 위한 더불어 있음의 철학과 더불어 있음의 신학을 궁리해 본다. 우리 시

 

w

ww.bookk.co.kr

유대칠, <대한민국 철학사>

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3690705\

 

대한민국철학사 - 교보문고

이 책은 이 땅에서 우리말 우리글로 역사의 주체인 우리가 우리 삶과 고난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한 결과물이 한국철학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변방에서 중국을 그리워하며 한자로 철

www.kyobobook.co.kr

유대칠 <신성한 모독자>
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55401217&orderClick=LOA&Kc=

 

신성한 모독자 - 교보문고

중세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지성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철학자 13인이 일으킨 파문과 모독의 일대기를 다룬 『신성한 모독자』. 중세에서 이단이란 그리스도교 외부에 있는 다른

www.kyobobook.co.kr

aladin.kr/p/EPxgH

유대칠의 <일반 형이상학 입문>

 

일반 형이상학 입문

일반 형이상학 입문

www.aladi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