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금붕어 세 마리가 있다. 일명 의로운 삼 형제다. 이 친구들은 아들의 희망에 따라 우리와 더불어 살게 되었다. 일정 시간이 되면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또 주기적으로 물을 갈아주어야 한다. 어찌 생각하면 상당히 성가시다. 그러나 그 친구들이 있어 좋은 점이 있다. 그냥 하루에 한 번 금붕어 녀석들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나름 마음이 편해진다. 딱 그 정도다. 금붕어가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돈과 국가 우월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국가에 기여하고 돈이 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 조금은 흔한 생각이 되어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않고 고양이나 개와 더불어 살아가며 반려동물들을 아끼고 살아가면 그 힘으로 출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것이지 왜 저러고 사는가 하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참 서글프다. 남이 개와 고양이와 더불어 살든 난초와 더불어 살든 그들 삶의 가치와 선택 그리고 그 소중함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들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이것을 무시하는 순간 우리는 적어도 그들에겐 잔인한 폭군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과거 우리는 동물을 그저 도구로 생각했다. 사실 과거엔 양반 남자가 아니면 모든 것이 다 도구였다. 노비는 양반 가문을 위하여 노동하는 도구이고, 백정을 고기를 먹기 위한 도구이고, 여자는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였다. 노비도 족보가 없고 백정도 족보가 없으며, 여자도 족보에 이름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누군의 딸 혹은 아내로 올려졌다. 과거는 그랬다. 그러니 동물은 얼마나 심했겠나. 그냥 죽여도 그만이다.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살아서는 죽으라 노동을 시키고 죽으면 살을 고리로 만들고 뼈는 곰탕을 만들었다. 정말 뼈까지 빼앗아 먹은 것이다. 지금은 더 심해졌다. 태어나자 말자 알을 낳지 못하는 수탉은 갈려 죽는다. 알을 낳을 수 있는 암탉을 자기 한 몸 움직이기도 힘든 곳에서 평생 살며 알을 생산한다.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면 갈아서 닭 너겟을 만들어 먹어 버린다. 소도 마찬가지다. 평생 젖소는 젖을 짜고 강제 임신을 당하고 고기가 된다. 과거 주변 사람이 씨돼지를 키웠다. 그 돼지는 엄청나게 크다. 평생 그 돼지는 정자를 기계에 빼앗긴다. 일평생 암퇘지를 한번 보지 못하고 평생 인공 질에 의하여 강제로 정액을 사정하게 하고 그 정액으로 강제로 암퇘지를 임신시킨다. 그리고 우린 고리를 먹는다. 개는 더 심하다. 아주 잔인하게 죽여진다. 서로가 보는 가운데 개는 죽임을 당한다. 개장의 개는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본다. 다른 개의 죽음을 마주 보면서 말이다. 과거와 같이 단백질이 부족한 시기도 아니지만 우린 그렇게 대량으로 아주 잔인하게 동물을 먹이며 살아간다. 이것이 일상인 이들에겐 고양이와 개를 가족의 일원으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모를 것이다. 모르면 그냥 침묵하면 그만인데 또 그들 가운데 몇몇은 잔인하게 동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의 삶을 모욕한다.
뱅시안 데스프레(Vinciane Despret, 1959~)는 동물과 더불어 살아감에 대하여 고민한 철학자다. 환경에 대한 철학함에서 우린 기본적으로 동물과 더불어 삶에 대하여 고민해봐야 한다. 자연스럽게 말이다. 환경은 우리의 밖 우리의 보호 대상으로 있는 우리의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한 자연 전체다. 엄밀하게 자연과 우주 전체다. 우리는 동물을 과연 우리와 더불어 자연과 우주 전체의 일원으로 온전히 보았는가? 아닐 것이다. 우린 우리 스스로를 우주의 밖으로 몰아내며 사람만이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고등한 존재이고 다른 존재들은 우리 사람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그 무엇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사람의 뇌와 동물의 뇌는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과거 뇌의 R복합체는 공격적 성형을 가지게 하며 파충류의 영역이며, 변연계는 정서적 서형을 가지게 하며 포유류의 영역이고 마지막으로 대뇌피질은 생각하게 하며 사람의 영역이란 삼위일체 뇌 이론이 유행하였다. 파충류에서 포유류를 걸쳐 사람으로 진화하는 여정의 흔적을 이야기하며 사람만이 생각하는 기능을 가진 뇌라며 사람의 뇌는 구조적으로 다른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지금도 구글 같은 곳에서 찾으면 마치 사실처럼 나오는 이러한 정보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의 뇌나 다른 포유류의 뇌나 구조적 사이는 없다.
우린 사람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집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사람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일까?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사는 새인 남부얼룩무늬꼬리체는 이타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와 위계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우리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이 동물에게도 있단 말이다. 그런데 우린 이미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다는 전제 속에서 그들을 본다. 진화의 도상에서 우리 사람보다 덜 진화된 존재, 유희를 알지 못하는 존재로 새는 본다. 그렇기에 우린 새의 춤을 너무나 쉽게 번식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한다. 그들의 유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유희를 위하여 춤을 추는 사람은 사람만의 몫이기 때문이다. 동물도 번식이 목적이 아닌 유대감을 목적으로 한 성관계가 이미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현실을 우린 그저 우리의 생각 속에서 구속해 버린 것이다. 창조론자는 신이 사람이 되고 존재로 창조했고 사람이 아닌 저들은 생각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창조했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저 자신의 보호나 관리의 대상 정도로 생각한다. 진화론자는 새와 다른 동물을 아직 사람만큼 진화하지 못한 존재로 규정해 버린다. 참으로 건방진 판단이다. 사람이 아닌 동물들 역시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진화를 이어가는 존재다.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린 이젠 동물의 편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 역시 사회를 이루고 서로 유대감을 느끼며 우리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우리와 더불어 이 우주 속 각자의 본질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란 말이다. 우리 사람의 관리와 지배의 대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린 그들에게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지금 이 땅 수많은 동물의 잔인한 죽음, 그 죽음은 우리 사람의 탓이니 말이다. 돼지와 닭 그리고 소가 전염병에 노출되자 우린 마치 그 존재들은 일종의 수동적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다 죽어 묻어버렸다.
그들의 편에서 그들은 정말 그런 대량 학살을 수긍했을까? 치료보다 죽임의 길을 그렇게 빠르게 결정하고 그렇게 수많은 생명이 순식간에 죽는다. 지금이라도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세상을 이해하고 그들을 자연 속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주체적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니 깨우쳐야 한다. 그것을 깨우치지 못하고 사악한 짓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양치기는 양과 대화해야 한다. 양에게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양의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좋은 양치기는 양과 대화하는 존재이지 병들면 죽이고 시기가 되면 털로 돈을 벌고 쓸데없으면 죽여 고기로 먹어버리는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선 양과 더불어 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 우리 사람이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말이다. 새와의 더불어 있음도 그와 같아야 한다. 새가 생각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그들과의 더불어 있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린 이제까지 그들에게 너무나 사악한 벗이었다.
뱅시안 데스프레는 동물과 더불어 살기에 대한 철학함의 여러 쓸모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지금 환경 철학 혹은 신학을 궁리하는 이라면 그의 철학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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