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란 하나의 체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질서를 고집했다. 조선은 민중의 나라인 '대한민국'이 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국'을 고집했다. 나의 책 <대한민국 철학사>가 조선의 철학과 구분되는 대한민국의 철학을 위한 애씀이라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러한 차이다. 조선은 법적으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있다. 왕과 양반의 나라이고, 백정과 기생의 나라일 순 없었다. 조선은 마지막까지 그러했다. 설령 외국의 종교인 가톨릭 교회를 받아들여 성당을 세워도 모든 민중이 평등해야 한다는 동학은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곳은 조선은 평등이란 말이 곧 반란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조선의 고집스러운 위계질서에 대한 고집은 그 질서 밖의 무질서를 만들어냈다. 바로 19세기 동안 줄곧 쉬지 않고 이어온 항쟁의 역사다. 역사는 많은 경우 아직 이를 '민란'이라 부른다. 양반 중심의 조선에서 양반의 시선으로 그 시대의 민중을 보니 그 민중들의 평등에 대한 외침이 질서를 파괴하는 '난'으로 보이는 것인가? 만주족이 일으킨 호란이나 일본이 일으킨 왜란과 같은 수준으로 민중의 분노를 민란이라 부르는 것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은 항쟁이다. 있어야 할 곳이 마땅히 있지 못한 그 억울함에 분노! 그 분노에서 일어난 항쟁이다. 그 항쟁은 무질서를 만든다. 조선이란 단단한 질서에서 일어난 부조리의 아픔들이 만든 부조리는 그 질서에 대한 분노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긍정의 몸짓이기도 하다. 진화를 향한 몸짓 말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사회가 누군가 혹은 몇몇 계층만을 위하 통치의 질서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분노의 몸짓, 새로운 형태를 향한 진화의 몸짓 말이다. 19세기 그 분노의 외침과 몸짓은 20세기 일제강점기와 반민주 독재세력의 시대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그 힘은 이어져오고 있다 믿는다. 이제 우린 그 거짓의 질서에 대한 분노, 그 질서에 대한 분노의 무질서를 위한 몸짓으로 살았다면 어쩌면 또 다른 진화를 위한 대안한 질서를 궁리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그 질서는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니라 항상 역동하며 살아 변화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최소한 위계의 질서는 아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성경>과 같은 고정된 텍스트에 의존하는 종교는 너무나 쉽게 관념화된다. 글 중심의 종교는 그 글에 대한 관념에 집중하게 되고, 그 관념만을 정답이라 고집하게 되고 그 관념의 밖은 인정하지 않고 바로 배제해 버린다. 그리스도교는 아주 체계적인 질서를 오랜 시간 궁리했다. 위계가 아니라 말은 하지만 사실상 위계의 종교로 대주교에서 사제 그리고 일반 성도에 이르는 질서를 '사도좌'와 '성전' 등의 논리로 유지해 왔다. 그 질서는 견고하였다. 그 견고함의 중심엔 대주교와 주교가 있었고, 그 나머지는 수동적인 존재들이었다.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민중들에 의하여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 현대에 들어서다. 그 이전 <성경>은 민중은 알지도 못하는 언어인 라틴어로 쓰여있었다. 주교와 사제들은 민중이 알지도 못하는 언어로 자신들만의 견고한 질서를 스스로 확인하고 유지하였다. 그 단단한 질서는 그 질서의 밖, 무질서를 유발하였다. 무소유를 외치면서 거대한 교회를 높이고 이런 저런 사업으로 많은 돈을 모르는 교회, 중세 후기 흑사병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교회의 소유욕은 줄어들지 않았다. 민중의 아픔이 교회의 아픔이 되지 못한 것이다. 교회는 자신들의 그 외계의 질서 속에서 안주하며 있었다. 자신들만이 거룩한 사도좌의 계승자이고, 신을 향한 유일한 통로라는 생각은 더욱더 그들의 그 위계적 질서를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 단단함에 대단해지면 질수록 그 밖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졌다. 그렇게 일어난 것이 근대 유럽의 그리스도교 개혁 운동이다. 개신교회의 등장은 그 단단한 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성도들이 곧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제임을 선언하였다. 이제 교회는 거대한 보편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제국의 모습에서 조금 더 개인의 아픔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개신교회 역시 시간이 지나며 그 내적 질서화의 과정 속에서 서서히 단단한 위계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목사과 일반 신도 사이의 위계 말이다. 그리고 그 질서는 다시 무질서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그 질서를 밖으로 웃으며 나아가게 만들었다.
왜 거대한 질서는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못한가? 그 거대한 질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질서가 되는 순간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 질서를 더욱더 고집하면 고집할 수록 무질서는 더욱더 강성해진다. 그렇게 거대한 질서는 무너진다. 조선을 거부한 동학 농민운동의 민중들이 등장하고 단단한 독재의 질서를 거부하는 민주운동의 민중등이 등장하고 부조리한 종교를 부정하는 종교개혁자들이 등장하듯이 말이다. 그것이 이 세상의 이치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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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권은 저의 칼럼 모음집과 묵상집입니다. 앞으로 저의 칼럼과 길지 않은 글들은 모두 일정 분량이 되면 모음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오캄연구소를 위하여 구입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 두 권의 책은 저의 저서입니다. 더불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대칠, <복음이 전하는 더불어 삶의 행복>
유대칠, <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유대칠, <대한민국 철학사>
유대칠 <신성한 모독자>
유대칠의 <일반 형이상학 입문>
유대칠의 <철학의 과정>
유대칠의 <야고보와 요한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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