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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고난의 주체가 희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1. 8.

오랜 시간 인류는 신분제 사회를 당연시 하고 살았다. 당연히 태어나며 정해진 신분이 그의 삶 전체를 지배했다. 양반이나 귀족으로 태어나면 그의 삶은 큰 노력 없이 많은 것을 누리며 살 것이고, 노예나 노비로 태어난다면 그의 행실과 무관하게 그는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다. 그리고 노력을 한다 해도 그 삶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 조직의 부조리를 온 몸으로 당하며 살아온 이들은 바로 그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다. 구한말 사회적 무시 속에 살았던 기생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 부조리한 운명에 대하여 고민하여 스스로 새로운 대안을 궁리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유학을 떠나려 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사상을 일구어가며 부조리를 일상이 아닌 나쁜 것으로 여기는 세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기생이 말이다. 조선 사회 그렇게 무시 당하던 이들이 말이다. 양반도 아닌 그들의 노리개 같던 그들이 말이다. 일제강점기 그 부조리의 사회에 대하여 분노한 백정이 있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그렇게 기이한 일도 아니다. 기생과 백정, 그들은 그 사회 부조리의 가장 잔혹한 폭력에 가장 아프게 살았던 이들이다. 그 시대 고난의 주체가 되어온 이들이다. 그 시대, 부조리가 일상이던 그 시대의 십자가 앞에 홀로 힘겨운 눈물과 피를 흘리던 이들이다. 그렇게 그들이 고난의 주체이기에 그들은 희망의 주체가 되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난의 주체로 그 고난을 너무 잘 알아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도교 성도들을 보자. 이 사회 그리스도교의 복음에서 보자면 너무나 많은 부조리들이 가득하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또 아집 속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싸운다. 심지어 그 싸움의 공간이 작은 성당 혹은 교회이기도 하다. 그 사랑의 공간에서 서로의 이기심으로 싸운다. 그런 부조리의 공간에서 치열하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하는 이들이 일상의 성도들이다. 신앙을 간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이 성도들이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아픔을 외롭게 두지 말라는 양심을 통하여 울리는 신앙의 외침 앞에서 자신의 이기심과 갈등하며 살아가는 이들, 이런 저런 사회의 부조리에 타협하고 살아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치열하게 다투며 살아갈 것인지 갈등하고 선택해야 하는 이들, 바로 이런 이들이 일상의 성도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제와 수도자에 비하여 더 힘들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성도들이다. 

그런데 막상 그런 일상의 치열한 부조리를 온 몸으로 살지 않는 사제와 수도자에게 배움을 청한다. 제대로 경험하지도 않은 이들에게 길을 청한다. 그러니 그 길은 추상적이고 피상적이다. 조선 후기 사회의 부조리를 선비들은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이야기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동학은 달랐다. 신분제 사회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며 분노를 소리를 냈다. 비록 조선의 권력자와 일본군에 의하여 잔혹하게 무시되었지만, 그 역사적 외침으로 실패하지 않고 우리 역사의 뜻을 일구었다. 그리고 그 뜻은 3.1혁명이 되고 독립운동이 되고 이 땅 민주화운동의 역사로 흘러갔다. 조선 후기 그 부조리의 삶, 그 삶의 고난을 온 몸으로 살아온 이들의 분노가 새로운 시대의 희망, 그 희망의 보다 더 구체적인 주체가 된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백정과 기생 처럼 그렇게 지금의 부조리를 지금 이 사회의 부조리 그 부조리의 고난으로 아파하는 고난의 주체가 희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조리 속에서 신앙의 고난을 직접 접하는 이들이 신앙에 있어 희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성도들도 공부하고 궁리하고 기억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궁리하고 궁리해야 한다.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아 능동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이 세상 속 신앙의 고난, 부조리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고민하고 궁리해야 할 그 고난의 주체는 일상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다. 그러니 더욱 더 절실히 익히고 공부해야하는 이들도 성도들이다. 기도문만을 열심히 외우며 기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스스로 고민하고 그 고민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 고민을 구체적인 삶으로 답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꼭 말이다. 사제와 수도자에게만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주체성 있는 신앙을 보여야 한다. 고난의 주체가 이 고난을 이길 희망의 당당한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전주에서 찍은 동학 관련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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