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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눈물의 분노가 저주가 되지 않았으면...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1. 14.

"또 주님은 기도하셨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 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없는 분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청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죄를 위해 청하였습니다." <치쁘리아누스의 '주의 기도에 대하여' 30항>

죄 없는 분, 악으로 선이 결핍되지 않은 분, 무엇으로 바랄 것이 없는 분, 그런 분이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완전하신 분이 무슨 기도를 하시나 들어 보면 기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이만큼 가졌으니 더 가지고 싶다하시지도 않으시고, 자신의 모르는 이들의 괴롭힘 앞에서도 저주의 기도로 그들에게 재앙을 달라 청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자신이 아닌 그런 슬픈 무지 속에서 죄 가운데 살아가며 절망의 길이 희망의 길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기도합니다. 이것도 달라 기도하고 저것도 달라 기도합니다. 이것도 하겠으니 이것도 달라하고 저것도 하겠으니 저것도 달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의 그 슬픔을 위해, 그 아픔을 위해 내가 나를 내어 놓으니 그가 아프지 않게 해 달라며 그 아픔 앞에 내가 손수건이 되고 벗이 되겠다며 남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서로의 아픔 앞에서 자신의 내어 놓으며 기꺼이 고난의 길 더불어 가겠다는 마음, 그 마음의 기도가 없습니다. 나만의 이야기인가요. 그러면 오히려 다행입니다.

모두가 나만을 이야기하니 흩어져 갑니다. 서로 서로 흩어져 갑니다. 사제는 사제대로 수도자는 수도자대로 성도들은 성도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흩어짐이 사탄이 원하는 모습이고, 사탄 그 자체일지 모릅니다. 설사 서로의 잘못 앞에서 눈물의 분노를 던져도 저주의 마음은 없었으면 합니다. 참된 신앙은 그의 아픔 앞에서도 저주보다는 온전한 길을 향한 더불어 감을 이야기하는지 모르니 말입니다.

2019년 11월 12일

유대칠 암브로시오

왜관 분도수도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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