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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지독한 아픔은 지금도 그대로다. 그래서 지금도 희망을 품는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1. 14.

"나봇 이야기는 옛날 일이죠. 그러나 지금도 매일 일어나는 일입니다. 날마다 다른 이의 것을 탐하지 않는 부자가 어디 있습니까? " (암브로시오, <나봇이야기> 1장1)

아프지만 사실이다. 친일파는 그때에만 있었나. 지금 친일파는 이름을 다르게 할 뿐 여전이 존재한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고, 고려 시대에도 그러했다. 지구 곳곳에서 언제가 일어난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절망의 이야기인가? 어쩌면 절망을 그저 운명이나 원래 세상은 그러한 것이니 생각하고 그 절망을 자신의 일상으로 쉽게 받아드리는 것은 아닌가? 절망의 공간은 희망의 공간이다. 절망의 공간에서 그 절망을 벗어날 희망을 품는다. 절망은 희망의 터다.

전태일은 보자. 그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그토록 힘든 가운데 자신의 가진 작은 것도 나누는 그 사랑은 무엇인가? 절망이 일상인 그곳에서 그는 희망을 믿었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드리우며 희망의 불을 피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약자들이 아집 가득한 이들 사이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낼 때, 그의 그 희망 가득한 불은 우리의 작은 촛불이 되기도 하고, 우리 가슴 속 뜨거움이 되기도 한다. 절망이 당연해 보이는 그곳에서 학대가 당연한 바로 그곳에서 그는 희망을 품는다. 그것도 자신만의 기쁨을 위한 희망이 아닌 기꺼이 우리의 희망을 위해, 우리 가운데 너의 눈물을 위해 그 눈물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자신을 걸었다. 자신을 거는 희망을 보였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 말이 무섭다. 그 변하지 않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는 이 땅에 와 십자가에서 고난 당했고,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자신을 우리 가운데 너를 위해 내어 놓으며 희망을 말했다. 절망을 좌절이 의 이유가 아닌 우리네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갈 희망을 우리에게 보였다.

희망은 누군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만들어야 한 그 무엇이다. 기다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곳이고, 그 만듬의 과정 자체가 바로 희망이다. 내 작은 불편에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는 마음, 그 마음이 절망이다. 내 작은 불편에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불편하고자 하는 그 작은 마음이 희망이다.

전태일의 희망을 오늘도 생각해 본다. 

절망은 희망의 터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19년 11월 14일 아침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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