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봇 이야기는 옛날 일이죠. 그러나 지금도 매일 일어나는 일입니다. 날마다 다른 이의 것을 탐하지 않는 부자가 어디 있습니까? " (암브로시오, <나봇이야기> 1장1)
아프지만 사실이다. 친일파는 그때에만 있었나. 지금 친일파는 이름을 다르게 할 뿐 여전이 존재한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고, 고려 시대에도 그러했다. 지구 곳곳에서 언제가 일어난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절망의 이야기인가? 어쩌면 절망을 그저 운명이나 원래 세상은 그러한 것이니 생각하고 그 절망을 자신의 일상으로 쉽게 받아드리는 것은 아닌가? 절망의 공간은 희망의 공간이다. 절망의 공간에서 그 절망을 벗어날 희망을 품는다. 절망은 희망의 터다.
전태일은 보자. 그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그토록 힘든 가운데 자신의 가진 작은 것도 나누는 그 사랑은 무엇인가? 절망이 일상인 그곳에서 그는 희망을 믿었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드리우며 희망의 불을 피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약자들이 아집 가득한 이들 사이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낼 때, 그의 그 희망 가득한 불은 우리의 작은 촛불이 되기도 하고, 우리 가슴 속 뜨거움이 되기도 한다. 절망이 당연해 보이는 그곳에서 학대가 당연한 바로 그곳에서 그는 희망을 품는다. 그것도 자신만의 기쁨을 위한 희망이 아닌 기꺼이 우리의 희망을 위해, 우리 가운데 너의 눈물을 위해 그 눈물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자신을 걸었다. 자신을 거는 희망을 보였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 말이 무섭다. 그 변하지 않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는 이 땅에 와 십자가에서 고난 당했고,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자신을 우리 가운데 너를 위해 내어 놓으며 희망을 말했다. 절망을 좌절이 의 이유가 아닌 우리네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갈 희망을 우리에게 보였다.
희망은 누군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만들어야 한 그 무엇이다. 기다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곳이고, 그 만듬의 과정 자체가 바로 희망이다. 내 작은 불편에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는 마음, 그 마음이 절망이다. 내 작은 불편에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불편하고자 하는 그 작은 마음이 희망이다.
전태일의 희망을 오늘도 생각해 본다.
절망은 희망의 터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19년 11월 14일 아침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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