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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신학

서로 다른 두 가지 종교...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1. 10. 12.

서로 다른 형태의 두 종교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맨 처음,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신과 함께 있었으며, 그 신은 말씀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이다. ‘말씀’이라 번역하지만 로고스라는 말은 오랜 시간 철학자들을 괴롭힌 말이다. 우주 전체를 설명할 하나의 원리(原理) 등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해하면 바로 그 원리가 신과 함께 했고 그 신이 바로 그 원리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가장 온전히 잘 살아가는 것은 그 원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된다. 원리를 벗어나는 것은 우주 전체의 질서에서 벗어나 사는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원리를 어찌 알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진다. 그 원리대로 살고 싶어도 그 원리는 그냥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는 눈에 보이는 원리다.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그렇게 원리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된다. 그런데 예수 이후 더는 눈으로 그 원리를 볼 수 없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우선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기억하고 있기에 그들이 그 원리의 계승자가 된다. 신적 존재인 예수, 스스로가 원리 그 자체인 예수의 계승자가 아니라, 그 예수의 말씀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계승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사도전승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하여 그 예수를 다르게 기억하는 다양한 이들을 이단(異端)으로 물리쳤다. 예수에 대한 기억은 모두 예수의 제자인 사도의 이름으로 기록되었지만, 몇몇은 수용되지 못했다. 예수를 피조물로 보는 기억도, 예수를 온전히 신으로만 보는 기억도, 예수를 그저 탁월한 선생으로만 보는 기억도 모두 사도의 이름으로 기록되었지만 이단으로 물리쳐졌다. 육화(肉化)된 원리인 예수, 온전한 신이며 동시에 온전한 사람인 그 예수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더는 예수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예수를 가장 잘 기억하는 사도의 교회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곳만이 유일한 제대로 된 기억의 장소이며, 동시에 새로운 계시들이 허락되는 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교회에서 사도의 후계자인 주교의 도움으로 신에게 나아가야 한다. 결국 그 비워짐은 신으로 채우기 위한 비움이며, 그렇게 교회와 신적 존재인 예수를 통하여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 즉 우주의 원리와 하나 될 수 있단 말이다. 스스로 혼자 우주의 원리와 하나가 될 순 없다. 교회 속에서 주교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인도의 오랜 종교, 불교보다 더 오랜 종교, 당연히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종교, 브라만교에서도 우주엔 하나의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바로 ‘범(梵)’, 즉 브라만이다. 누구나 ‘범’과 하나가 될 수 없고 ‘범’을 제대로 알 수도 없다. 그렇기에 브라만교는 ‘사제(司祭)’가 필요하고 사제 중심의 종교다. 사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베다>라는 경전이 이들에겐 아주 중요하다. <베다>와 사제의 도움으로 개별적 영혼은 우주의 영혼인 범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 불교는 <베다>를 인정하지 않고 사제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불교는 수도자뿐인 종교다. 가톨릭 교회나 동방정교회 그리고 브라만교의 사제와 같은 존재가 없다. 싯다르타 역시 그리스도교의 예수와 같은 신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깨우침을 준 선생이다. 예수를 믿듯이 불교는 싯다르타를 믿지 않고, 가톨릭 교회와 브라만교의 사제와 같은 이가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에 필수적이지도 않다. 불교는 엄밀히 영속한 영혼을 믿지도 않고, 불교에서 마음을 비우는 것은 모든 욕망과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그 비워진 자리에 신과 같은 존재를 모시기 위함이 아니다. 신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하여 범이나 신과 하나 되기 위함이 아니다. 그냥 철저하게 사라지기 위해 비운다. 하나의 신과 원리가 있고 사람이 있으면 그 사이 사제가 있다는 세상은 위계의 세상이다. 아무리 평등을 이야기해도 사제는 구원에 있어 신과 사람 사이 존재한다. 그들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나 불교는 그러한 형태를 거부했다. 사제도 없고 어떤 신적 존재도 없으며 그런 원리도 없다. 모든 민중은 스스로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자신도 결국 아무것도 아님을 깨우친다면 모든 세상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의 수행은 점점 너무나 어려운 것이 되어갔다. 깊은 수행, 신과 하나 되기 위함도 아니고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비우는 행위는 세속의 욕심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겐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불교는 인도에서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브라만교는 조금 더 편한 형태로 변형되어 민중에게 찾아간다. 이것이 힌두교다. 다양한 신들을 포용하며 다양한 종교들을 힌두교 안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힌두교도 내면에 하나의 신이란 생각이 있다. 힌두교의 ‘브라마 신’은 하늘, ‘비슈누 신’은 태양, ‘시바 신’은 달을 상징한다. 브라만 신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이며, 비슈누 신은 생성의 신이며, 시바 신은 파괴의 신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생성되어야 하고 또 파괴되어야 한다. 결국 이 셋은 서로 다른 세 신이 아니라, 하나의 신이 된다. 이렇게 힌두교는 하나의 신, 하나의 원리를 유지하면서 민중의 다양한 모습들을 포용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의 대표 종교가 되어있다. 불교도 동아시아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그 지역 민중들의 종교와 생각을 포용한다. 당장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이는 산신각을 봐도 알 수 있다. 그 지역 산신이니 신령과 같은 민간 신앙의 대상은 불교 안으로 포용한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를 만나면 중국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이 땅에 와서는 이 땅의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결국 깨우침으로 완전히 비워질 때 참된 열반(涅槃)에 이른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지키고 있다.

 

불교는 사라짐을 추구한다. 완전한 사라짐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힌두교 그리고 브라만교는 사라짐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존재로 나아감을 추구한다. 천국이나 신과의 합일 등이 그러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와 크게 다툰 ‘영지주의’는 ‘신령한 앎’이란 ‘영지’, 즉 ‘깨우침’으로 구원을 이룬다고 한다. 내가 누구이고 이 우주 가운데 나의 존재에 대하여 깨우치면 그는 구원에 이른다고 본다. 그들에게 예수는 탁월한 선생일 수 있지만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믿고 있듯이 태어나고 죽고 부활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에게 신앙의 대상은 이것이 아니다. 철저한 이원론으로 물질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 자신을 깨우치면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여기에서 예수는 그저 선생일 뿐 그 이상이 아니다. 즉 영지주의라는 신비주의는 ‘자력종교’의 모습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많이 다르지만 많은 부분 불교와 교집합을 이룬다. 

 

불교와 영지주의는 믿음이 아니라, 깨우침을 강조한다. 그 깨우침으로 참 자유를 얻는다. 영지주의는 신과 하나 될 수 있다하고, 불교는 그 조차 부정하고 완전한 사라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지혜에 이르게 된다 한다. 하지만 영지주의의 현대적 모습은 불교적인 느낌도 있다. 그래서인지 영지주의 문헌인 <토마스 복음>을 불교신자들 가운데 읽고 접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힌두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유대교는 믿음을 강조한다. 깨우침이 아니라, 결국 믿음으로 구원을 이룬다. 그리고 사제가 필요하다. 그 사제가 가톨릭교회와 같이 일부이든 개신교회와 같이 모든 믿는 사람이든, 문헌과 기도로 신을 만나는 사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믿어야 하는 내용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서 ‘신조’와 교리가 매우 중요하다. 

 

맨 처음 말씀이 있었다는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힌두교 그리고 브라만교다. 그러나 불교는 처음부터 그런 말씀은 없었다는 종교다. 그러니 그 말씀을 기억하는 사제가 필요 없다. 그저 지그 이 자리 나의 욕심으로 힘든 나와 대중에게 덜 힘겨운 삶을 위해 아집을 버리며 살아갈 내가 있을 뿐이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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