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오랜 역사... 사실 이 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봐야 할지 모른다. 고대의 철학이 지금의 철학과 같은 단어의 이름을 가진다고 같은 내용으로 있을까? 중세와 근대 그리고 현대의 철학은 서로 다 다른 것 같다. 현대의 의미에서 중세의 철학은 철학일까?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가장 큰 성과라고 보는 것도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기억하는 거다. 신학자들이라 스스로 생각한 이들의 철학을 말이다. 과거 골동품 가게에서 골동품을 보고 있을 때 일이다. 지석, 즉 죽음 이의 행적을 적은 물건 하나가 나왔다. 당시는 북한에서 이상한 경로로 골동품이 들어오던 시기였다. 초라한 나의 눈에도 그것은 지금의 북한 어느 양반집 여인의 지석같았다. 지석의 질을 봐서 아무 높은 집안의 지석일 가능성이 클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물건은 팔렸다. 누군가에겐 그냥 장식품이다. 생각보다 단아한 하얀 액자에 한문이 적힌 그런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겐 어머니의 삶을 기록한 지석이고 누군가에겐 그저 장식품이고 누군가에게 연구해야할 대상이다. 그 누군가마다 지석이란 하나의 사물은 다르게 존재한다. 나에게 철학이란 말은 지석이 사람마다 다른 것보다 더 많이 다르게 시간과 공간마다 존재하는 것 같다. 어느 시대의 철학은 다른 시대엔 철학이 아니고, 같은 시대라도 누군가에게 철학인 것이 누군가에게 철학이 아니다. 철학의 역사란 것도 사실 후대 사람들이 그 시대의 조건 속에서 기억한 하나의 주관적 사실일 뿐이다. 같은 이름의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쩌면 하나의 이름으로 사용한다는 이유로 후대에 같은 존재라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행위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니 말이다. 한 편의 시와 같다고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 그 친구의 기억 한편에 등장하는 나란 주관에게 기억되는 그 어린 시절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옥이다. 그에겐 천국이고 나에겐 지옥이다. 기억이란 이런 거다. 같은 국민학교 사실이란 객관적 사실로 돌아보는 그 기억은 이렇게 다르다. 누가 거짓이고 누가 진실인지 사실 알 수 없다. 그 친구에게 천국은 누가 뭐라 해도 천국일 거고 나에게 지옥은 누가 뭐래도 지옥이니 말이다. 철학이란 이름으로 있던 그 사람의 행위도 서로 그렇게 다르고, 그렇게 다른 철학들을 기억하는 사람의 기억 속 그 철학도 그렇게 서로 다르다. 누가 정답이겠나. 그냥 저마다 저마다의 조건에 충실할 뿐이다.
내가 철학의 역사를 쓴다면 유대칠표 철학의 역사가 될 것이고, 처음부터 삐딱한 이야기를 할 거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유명하지 않아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이슈가 되진 않을 거다. 지구상에 나의 글을 돈을 내고 살 사람은 내 생각에 20-30명 정도다. 그리고 대부분 철학 전문가가 아니다. 누군가는 공사장의 일꾼이고 누군가는 식당의 직원이고 누군가는 그냥 은퇴한 할머니이며 누군가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고 누군가는 아주 작은 공장의 노동자... 등등등이다. 이들에게 나의 책은 논쟁의 장이 아니다. 그리고 저자는 어렵지 않게 만나 책의 내용을 물어 보면 답해주는 그런 그런 존재다.
대철학자나 대가의 철학사가 아닌 아무나의 철학사... 대철학자와 대가의 주관뿐 아니라, 길을 건다보면 하루에도 수백명씩 스치게 되는 나와 같은 아무개의 주관도 주관이다.
2022년 7월 15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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