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요한 1서 2장 10절)
처음에 빛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빛으로 가득했단 말은 눈을 뜨고 살았다는 말로 들립니다. 눈을 뜨고 살았으니 나의 앞에 아파하는 이가 보이고 그와 더불어 울며 웃으며 살았겠지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을 겁니다. 그러나 곧 어둠이 시작됩니다. 눈을 감고 살게 된 겁니다. 욕심의 눈을 뜨며 나의 앞에 아파하는 이는 보이지 않고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가 됩니다. 자기 욕심만 보고 살아가니 서로 다툽니다. 내 앞에 나 아닌 누군가는 나의 앞 길을 막는 방해꾼일 뿐입니다. 이제 나와 더불어 나와 벗으로 온 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 곳에 사랑이 있을까요?
사랑이 있는 곳엔 빛이 가득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봅니다. 더불어 울고 더불어 웃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홀로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아프고 더불어 이겨냅니다. 홀로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홀로 아프지 않으니 극단적인 선택도 줄어듭니다. 남을 아프게 하는 죄도 줄어듭니다. 너무나 당연히 말입니다.
삶 자체가 쉽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나쁘고 사악한 시선을 많이 봅니다. 그 시선의 주인공들이 때론 성직자이고 목회자이며 수도자이고 신도들입니다. 한마디로 신을 찬양하며 산다는 이들이 신을 찬양하면서 남은 그리도 잘 무시합니다. 신을 향한 이론엔 그리도 해박한데 이 세상 아픔에 대해선 그리도 모릅니다. 고아는 그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라며 그들을 함부로 낮추어 보는 시선에서 이미 보육원을 두고 일어난 그들의 악행이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자신들의 보호를 받아야 할 존재하는 생각에서 여러 복지 사업에서 그들이 저지른 악행이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말라는 사랑이라지만 그런 사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타인의 존재, 그 성스러운 존재를 향한 폭력입니다. 함부로 수동적인 존재 부족한 존재라 여겨버리는 폭력이란 말입니다.
종교니 철학이니 다 접어두고 사랑 가득한 곳, 서로의 아픔을 마주한 곳, 그 아픔을 서로 더불어 안고 살아가는 곳엔 서로를 향한 죄도 덜할 겁니다. 분명히 말입니다.
유대칠
2022년 8월 20일
일상 속 종교를 떠나 사유하는 신학을 모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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