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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기도하는 이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1. 23.
  1. 기도하는 사람은 말이나 청원함에 있어 절제하고 조용하고 ‘부끄러움(pudorem)’이 있어야 합니다.

치쁘리아누스의 <주의 기도에 대하여>에 나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말이나 청원함에 있어 절제있고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조금 의미를 좁혀서 신앙이란 것을 가진 이들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느님'에게 기도한다지만, '우리'라는 말이 참 어색하게 이기적 기도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의 행복과 나의 소유와 나의 권력과 나의 높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심지어 조금 높은 자리에 오르고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조금 더 많은 권력을 가지면 그것을 가지고 '나'를 도운 하느님이라며 자랑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부유함은 누군가의 아픔을 조건으로 가능한 세상입니다. 이 점은 과거 예수님이 <주의 기도>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던 그 날 보다 더 심할지 모릅니다. 과거엔 의술이 없어 죽었지만, 지금은 살리는 방법을 알아도 돈이 없어 죽습니다. 일가족이 너무 가난해서 죽음을 선택합니다. 이들 가난의 탓을 누군가를 이들의 무능으로 돌릴 것입니다. 참 게으른 신앙입니다. 이들의 아픔 앞에서도 이들의 무능과 자신의 유능을 본다면, 참 게으른 신앙입니다. 우리 하느님 품 안에서 '그'와 '나'는 모두가 '우리'입니다. 더불어 있어야 하는 '우리'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분, '우리 아버지'이시지 '누군가의 아버지'로만 있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을 거름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더 많은 부유함과 권력을 위해 기도합니다. 참 염치도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힘들고 고통스러운 누군가의 아픔을 보면서 등을 돌리고 자신의 유능을 자랑합니다. 정말 이것이 우리 아버지이신 우리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이고 기도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신앙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독재자의 편에서 민중을 버린 신앙이라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종교입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하느님의 품에 있지 않습니다. 

자본의 편에서 민중을 버린 신앙이라면, 이 역시 부끄러움을 모르는 종교입니다. 절대 우리 아버지 우리 하느님의 품에 끼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 우리 하느님의 품 안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의 그 아픔, 비록 나와 무관한 이라지만 그 아픔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 가운데 너의 아픔도 남의 아픔이 아닌 나의 아픔으로 안아주는 신앙일 때, 우리는 조금 더 온전히 우리 아버지 우리 하느님 품에서 우리로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부끄러움 모르고 나의 하느님이 되어달라는 기도도 맙시다. 나만을 생각하면서 우리를 거짓으로 말하지도 맙시다. 남의 아픔 앞에서 남의 무능과 나의 유능을 보며 자랑하지 맙시다. 부끄러움을 압시다. 어쩌면 그것이 기도의 시작이고, 신앙의 시작일지 모르겠습니다.

2019년 11월 23일 01시

유대칠 암브로시오

전주  전동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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