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중세와 근대, 그렇게 신에 관하여 다양한 고민을 하고 논증을 하고 풀이를 했다. 중세만 그런 게 아니다. 근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 방식이 중세와 다를 뿐 결국 철학 논쟁은 대부분 신을 향했다. 그 신이 어떤 식이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이론으로 논증된 신학의 신, 또 철학의 신은 결국 사람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우리 삶에 다가오지 못했다. 오히려 신을 제외하고 진행된 학문은 빠르게 흘러갔다. 19세기 이후 그리고 20세기 이후 학문의 진보, 그 빠르기는 대단하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신을 향하여 논쟁하지 않는다. 신이 철학에서 그리고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빠져 버렸고 이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의 신학이 이루려는 건 신을 논증하거나 신을 이론 속에서 파악해 다가가려는 게 아니다. 언어의 밖, 그 신은 이론으로 어차피 들어올 수 없다. 그것이 유비적이든 일의적이든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말이다. 단지 그 신을 이론이 아닌 우리 삶에서 살아보고자 하는 거다. 이론이 아닌 삶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이를 위한 이론, 바로 그것이 내 신학의 기본이다. 즉 신학 역시 삶의 방식에 관한 고민이란 말이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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