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화 속에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 1장 1절)
“처음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하느님은 말씀이었다.”
“᾿Ε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앤 아르케 엔 오 로고스 까이 오 로고스 엔 쁘로스 똔 태온 까이 태오스 엔 오 로고스)
“In principio erat Verbum et Verbum erat apud Deum et Deus erat Verbum.”
(인 프린치피오 에랏 베르붐 엣 베르붐 에랏 아푸드 데움 엣 데우스 에랏 베르붐.)
이 세상은 오직 하느님뿐이었다. 그만이 홀로 있었다. 그의 생각, 즉 그의 말씀이 곧 그와 함께 있는 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에게서 모든 것에 나왔다. 나도 그에게서 그리고 나와 다른 너도 그에게서 나왔다. 어디 나와 너만이 그에게서 나왔겠는가. 아니다. 있는 모든 게 그에게서 나왔다. 지난 길 내 발에 밟히는 저 별것 아닌 돌과 흙과 잡초들도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 어디 그뿐인가. 저 웅장한 산도 그에게서 나왔고 저 광대한 우주도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
우리가 말씀이라 옮긴 헬라스어 로고스(ὁ Λόγος)는 ‘이치(理致)’란 말이 된다. ‘논리(論理)’란 말이 된다. ‘논리’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든다. 논리가 없으면, 그냥 소리일 뿐 말이 아니다. 우주가 이렇게 질서 정연하게 있는 것은 그냥 마구잡이로 있는 게 아니라, ‘이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치’로 인해 모두는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거다. 소리가 말이 되기 위해 조화를 지켜야 한다. 어지러운 우주가 아니라, 질서 정연한 우주가 되기 위해 조화를 지켜야 한다. 우린 바로 그 ‘조화’에서 나왔다. 그 ‘조화’가 하느님의 ‘뜻’이고, 바로 ‘하느님’이다.
‘조화’는 더불어 있게 만든다. ‘더불어 있음’ 그 자체가 사실 조화다. 어쩌면 우리가 이토록 괴로운 건, 그 조화가 무너지고, 나만이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나만이 더 높이 올라가야 하고, 나만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욕심이 당연함이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생각은 결국 조화보다는 다툼, 분열을 일으키니 말이다.
조화, 그 조화가 참 그리운 요즘이다.
2023년 6월 25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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