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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오늘, 함석헌 읽기: 씨알의 철학. 습작 1 (유대칠의 함석헌철학교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4. 3. 24.

씨알의 철학. 습작 1

유대칠 씀

“사실이란 내 주관과는 관계없이 따로 서서 객관적으로 뚜렷이 있는 것이라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에는 주관의 렌즈를 통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이란 없다. 어려운 철학이나 심리학의 설명은 그만두고라도 상식으로라도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주관을 막아내는 사실이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다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살림과는 아무 관련을 가지지 않는 것이요, 따라서 역사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2002), 42쪽

“사실의 자세한 기록은 전문가의 일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실의 역사, 기술의 역사, 연구의 역사다. 그러나 씨알은 그것보다도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를 요구한다. 세계의 밑을 흐르고 있는 정신을 붙잡게 해 주는, 어떤 분명한 주장을 가지는, 말씀을 가지는 역사를 요구한다. 그리고 전문가의 사명은 마지막에 한 권의 씨알의 역사를 쓰는 데 있다. 바다같이 넓은 연구가 있어도, 산같이 쌓인 사료(使料)가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2002), 43쪽

유대칠이 읽는다.

‘씨알’이란 두 말이 더한 말이다. ‘씨’는 작디작은 낱개의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씨’는 작디작은 생명의 시작이다. 아무리 덩치 큰 사람이라도 그 정자와 난자는 맨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작다. 사람보다 더 큰 나무라고 다르지 않다. 입김 한 번에 멀리 날아갈 작디작은 씨가 큰 나무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작아도 무력한 건 아니다. 힘으로 가득하다. 겹겹이 포개진 힘들이 가득하다. 그 겹겹이 포개진 힘을 하나씩 풀어가며 싹을 내고 줄기를 내고 잎을 내고 꽃을 내며 과실을 내고 또 수많은 씨를 낳아 온 땅에 뿌린다. 그러니 아무리 작아도 씨는 무력하지 않다. 끝없는 힘이 가득 차 있다. 그렇게 작디작은 ‘씨’에 가득한 게 ‘알’이다. ‘씨’는 ‘알’ 차다. 알차게 있는 게 씨다. 씨는 비어 있지 않다.

아무리 알찬 것이라도 씨알은 안과 밖으로 길을 내지 않으면, 빈 것이라 다름없다. 물길을 트고 밖의 물을 안으로 들려 품어야 한다. 또 잎으로 물을 내어놓아야 한다. 숨길을 트고 잎으로 밖의 공기를 안으로 들려 품어야 한다. 그리고 잎으로 공기(이산화탄소)를 내어놓아야 한다. 물길과 숨길만 있다고 살 수 없다. 흙이 품은 거름을 안으로 들려 품어야 한다. 그렇게 물도 숨고 양분도 품어 씨앗은 싹을 낸다. 씨알의 속은 알차지만, 이미 싹이 될 모든 걸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만, 자기 밖과 길을 트지 않으면, 즉 만나지 않으면 알찬 씨알도 결국 빈 씨알이 되어 버린다. 싹을 내지 못하고 썩어 사라져 버린단 말이다.

모든 ‘씨알’은 ‘씨’다. 낱개다. 하지만 홀로 낱개로만 있는 ‘씨’는 비록 생물학적으로 아무 문제없어도 씨알이 아니다. 씨알이 되기 위해선 홀로 있어선 안 된다. 길을 트고 만나야 한다. 더불어 있어야 한다. 그때 작은 낱개의 씨는 제대로 씨알이 된다.

낱개의 작은 씨알은 만남으로 더불어 있음으로 제대로 씨알이 되면 그 속 알찬 겹겹이 기운을 내어놓는다. 씨알이 물길을 트지 않고 밖의 물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물을 채우고 있다 해도 곧 죽어버린다. 씨알이 숨길을 트지 않고 밖의 공기를 만나지 않으면, 역시나 죽어버린다. 씨알은 홀로 있으면 죽는다. 씨알은 더불어 있어야 산다.

온 우주는 작디작은 씨알의 더불어 있음으로 전체를 이룬다. 수많은 씨알이 저마다 자기 안에 알찬 뜻을 담은 소리를 내며 자신과 더불어 있는 다른 씨알과 만나 대화하고 때론 다투고 때론 화해하며 산다. 그게 더불어 사는 거다. 물 없이 씨알이 없고 공기 없이 씨알이 없다. 하지만 씨알이 나무가 되어 죽어 썩어 거름이 되어야 또 다른 씨알이 있을 자리를 품게 된다. 썩어 물에 양분을 녹아내리고 더 크지 않고 썩어 이제 시작하는 싹에 햇빛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온 우주, 전체는 더불어 있다. 때론 살고 때론 죽으며, 그 죽음마저 전체를 위한 자기 내어줌으로 또다시 또 다른 씨알의 한 겹으로 부활하는 게 우주다. 그게 씨알이다.

그 씨알은 더불어 만나 싹을 내고 줄기를 내고 과실을 내고 씨알을 낳고 또 뿌린다. 주어가 씨알이라 씨알이 홀로 주체로 있는 것 같지만, 아니라, 씨알의 삶은 더불어 있음의 연속이고 쉼 없이 자기 밖과 만나며 자기 존재를 이어간다. ‘씨알의 있음’은 곧 ‘만남으로 있음’이며 ‘더불어 있음’이다. 그리고 ‘더불어 있음’과 그 ‘더불어 있음’으로 가능한 전체, 씨알이 만나고 씨알을 있게 하는 그 전체는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게 아니다. 구체적인 작디작은 씨알이 삶 속에서 쉬지 않고 만나고 더불어 있는 구체적인 모두 다. 지금 여기 일어나고 과거 일어났었고 앞으로 일어날 구체적 모두 다. 즉 나를 지금 여기 있게 하는 그 전체, 내가 뿌리는 내리는 그 전체는 나와 구체적으로 더불어 있으며 만나는 전체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는 게 만남 속 존재이고 더불어 있음의 존재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 철저히 홀로 좋음만을 따지지 않고 비록 내가 힘들고 아파도 기꺼이 전체의 좋음, 모두의 더불어 있음의 좋음을 위해 가야 할 길을 가는 게 씨알의 길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 나 홀로 좋음이 씨알의 나아갈 길이 아니며, 나 죽어 초월의 세상으로 가는 것도 씨알의 나아갈 길이 아니다. 지금 여기만 있는 이에게 미래는 아무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 나만 있을 뿐이다. 순간을 살뿐이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는 철저히 홀로 될 뿐이다. 미래 죽어서 세상만 보고 사는 존재도 다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여기 밖을 보며 산다. 여기 밖을 보며 사는 이에게 여기 자신과 더불어 사는 이가 보일리 없다. 참 씨알은 역사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며 역사 속에서 전체와 더불어 있고 역사 속에서 전체를 만나 산다. 산다는 것 자체가 시간적 존재의 숙명이며, 씨알은 바로 그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이란 역사 속에서 온전히 자기가 된다.

3.1 혁명은 실패다. 몸이 눈이 보는 3.1 혁명은 그렇다. 실패다. 독립되지 못했다. 이후로 한참 우린 일본의 힘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실패로 보이는 그 외침 속에서 이 땅의 씨알은 뜻을 품게 되었다. 힘없는 낱개의 각자가 뜻을 품어 외칠 때, 흩어진 여럿의 낱개가 아니라, 전체가 된다는 걸 삶으로 알게 된다. 뜻을 품은 역사는 실패라도 실패가 아니다. 실패가 사실이라며 그 실패가 진실은 아니다. 그 실패는 어쩌면 고난이고,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있기 위해 뜻을 품게 했다. 실패로 보여도 더불어 있는 씨알 전체의 뜻이 하나하나 낱개의 씨알에게 자신의 누구임과 어떻게 그 누구로 뜻을 품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 알려준다면, 그 알려줌은 초월의 자리 신에게서 내려오는 계시보다 더 강하게 이 땅 우리 모두, 우리 씨알 모두의 더불어 있음에 가능한 우리의 자기 긍정이 아닐까. 너 없이 나뿐이라는 “나는 나다”라는 차가운 자기 긍정이 아니라, “너는 나다”라는 우리의 자기 긍정 말이다. “나는 나다! 나의 말만 들어라!” 외치는 차가운 신과 교리 그리고 기득권 앞에서 나를 지우고 나는 나라는 이의 보어인 내가 되기 위해 스스로 죽는 이가 아니라, 너에게 너인 나와 나에게 너인 네가 서로 “너는 나다”다 품어주는 우리의 자기 긍정 말이다. 나와 다르지만, 너는 나이고 너의 억울함은 나의 억울함이며 우리의 억울함인 그런 우리의 자기 긍정 말이다.

그냥 두서없이 의식의 흐름으로 적어봤다.

'씨알의 있음'은 '만남 속 있음'이며 '더불어 있음'이며 '역사 속 있음'이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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