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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성찰 2019.11.29 (Meditationes de ente in nobis)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1. 29.

우리 가운데 있음에 대한 성찰 Mditationesde ente in nobis 

2019년 11월 29일 성찰

사람들을 떠나 아무도 없는 산 높은 곳에서 초월적인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던 이들 가운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 어찌 보면 신의 잔인한 절대적 침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초월적인 하느님의 지혜라면, 우리 밖 우리에게 남으로 있는 하느님의 지혜라면 과연 우리 삶의 참다운 지혜가 될까요?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 밖이 아닌 우리 안에 내적 초월성으로 나와 너를 우리라는 하나의 있음으로 묶어주는 신앙의 핏줄과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밖에 가서 하느님의 지혜를 구한다면, 어쩌면 그 우리 밖 하느님의 지혜는 참다운 하느님의 지혜가 아닌 허상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아픔을 모르는 지혜이고 우리의 고난을 모르는 지혜라면 우리의 구원과 무관한 지혜일지 모릅니다. 그런 지혜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때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죽었다며, 그런 초월적 신의 지혜, 우리를 안아주지 않는 우리 밖 신의 지혜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참다운 하느님의 지혜를 찾아 산 아래 사람들에게 찾아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이들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 땅에 일어난 그 수많은 비극에 그리스도교는 오랜 시간 가해자로 있었습니다. 신은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일까요? 그렇게 많은 이들을 죽이며 태초에 보기 좋았던 그 세상은 핏빛 가득한 비극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전교를 위해 죽이고 사랑을 전한다면서 죽였습니다. 죽이지 마라 명령한 하느님의 명령은 사람의 욕심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수많은 예외 사항 속에서 살인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우리의 신앙은 오랜 시간 우리가 아닌 나에 집중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절대적 고요 속에서 나의 있음 내면으로 찾아 들어가 그 가운데 하느님을 마주하려 하였습니다. 그렇게 나의 앞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나의 밖 누군가의 눈물은 나의 신앙을 흔드는 방해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사회적 정의를 외치면 교회가 정치꾼들의 공간이냐 소리치는 이들이 나왔으면 많은 이들은 침묵으로 그들의 그 이기적 신앙에 동조하였습니다. 그것이 잘못이라 이야기하면 또 누군가 교회가 가르치는 곳이며 소리치고 많은 이들은 또 침묵으로 그들의 이기적 신앙에 동조하였습니다. 어느 것이 하느님의 참 뜻인지 고민하고 공부하지 않는 교회, 사회적 정의가 무엇인지, 정말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회, 그 이기적 교회는 그저 교회 속으로 들어가 자기 속에서 자기만을 마주하는 니르시즘에 빠진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의 있음 속에 빠져든 나르시즘에 빠진 신앙은 결국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신앙이 될 뿐이었습니다. 

성당 앞에 교회 앞에 가난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가득한데 성당과 교회는 큰 건물에 집중하고 자신들끼리 모이는 신심 모임의 유지에만 온 힘을 다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이 사회 속 빛이고 소금이 되는 종교일까요? 이런 모습이 하느님이 원하는 신앙인의 모습일까요?

저는 그저 철저하게 홀로 있는 나의 있음이 아닌 우리 가운데 너와 더불어 있는 나의 있음에 집중하자 권하려 합니다. 나의 있음이 아니라 우리의 있음에 깊어지자는 말입니다. 나는 너무나 쉽게 쓰레기를 버리고 나는 너무나 쉽게 누군가에 대한 협담을 인터넷 댓글로 남깁니다. 내안에 빠져든 나는 나만 보기에 쓰레기로 아파하는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국가와 자연 만물을 볼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빠져든 신앙은 너무나 쉽게 협담하는 나의 그 잔인한 폭력적 쾌감이 저지르는 살인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나의 있음에 빠져드는 신앙은 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한 잔혹한 무감증 환자가 되어갑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더 아름다운 자연과 형제적 친교를 이루고자 하던 성 프란치스코의 그 마음에 우리가 이르지 못함은 왜일까요? 우리는 나뿐입니다. 자연은 나의 건강을 위해 선책할때 사용하는 그 무엇일 뿐입니다. 항상 이용당하기 위하여 우리 앞에 있는 이기적 나에게 노예 처럼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디 자연뿐인가요? 가난한 이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부자들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존재로 있다 여겨질 뿐입니다. 자연이든 약자든 이용당하고 버려집니다. 

타인의 아픔과 눈물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있는 그 우리 가운데 나의 있음, 즉 우리에게 깊어져 가는 것 대신에 우린 그저 철저하게 홀로 있는 나와 그 철저하게 홀로 있는 나에게 유용한 것만을 찾아 살았습니다. 신앙은 사랑이고 포기이며 용서라면서 결국은 신앙 역시 마음 평화를 누리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 신앙은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자연을 나의 앞에 수단으로만 있게 합니다. 그 가운데 철저하게 외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그 나는 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더 홀로 있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존재론적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외로움은 우리 가운데 있는 나, 우리 가운데 안길때, 나의 아픔이 함께 우는 너, 너의 아픔에 함께 우는 나, 이들이 더불어 있을 때 사라집니다. 이기적인 신앙은 더욱 더 외로운 나로 만들어가며, 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더 외로워지고, 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더 독해지고, 더 독단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같이 더불어 있어야만 합니다. 아픈 나무의 아픔에 울고 아픈 너의 아픔에도 울고 말입니다. 그때 나의 아픔에 나무도 울고 나의 아픔에 너도 웁니다. 그렇게 나와 너는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두지 않고 우리 가운데 하나된 우리의 아픔으로 있게 됩니다, 나의 아픔이 외롭지 않고 너의 아픔도 외롭지 않게 됩니다. 

일상의 공간에서, 너와 더불어 있는 여기, 울고 있는 너의 더불어 있는 여기, 아파하는 너와 더불어 있는 여기, 쓰려저 아파하는 너와 더불어 있는 여기, 바로 여기가 우리 가운데 깊어지는 바로 그 성찰의 공간, 참 하느님을 마주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가실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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