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인들은 이웃 형제자매들에 대한 책임감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언급하신 사제와 레위인의 위선에 빠져버렸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형제를 보면 아마도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가련한 영혼이여!" 그리곤 그냥 가던 길을 가버리는 겁니다.
안락을 추구하는 문화는 오직 우리 자신만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사랑스럽지만 허상 가득한 비누거품 속에 살도록 합니다. 그것들은 이웃에게 무관심하게 만드는 덧없고 공허한 망상에 빠져들게 합니다. 참으로 ‘무관심의 세계화’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화 된 세상에서 세계화된 무관심으로 타락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영향 없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건 내 일이 아니야! 하고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를 무책임한 ‘익명의 사람들’로 만듭니다.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7월 8일 람페두사 방문 (강론) 중 발췌
세상은 하나 되어 우리로 있는 모습을 파괴한다. 그 근본 이유는 바로 무관심이다. 안락을 추구하는 이 세상은 오직 나만을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있음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긴 생각을 하지 않고 매순간 즉각적인 욕구에 따라서 깊은 생각 없이 댓글로 악을 풀어내기도 하고, 남을 이겼다 좋아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무관심 속 폭력은 잔혹한 살인이 되어 누군가를 자살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살에도 무관심하여 죄책감이 없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목적 의식 없이 작동되는 악마 기계가 되어 간다. 스스로의 분노와 감정을 돌아볼 능력도 스스로 포기하고 그때 그때 분노를 야비하게 폭발하다 보니 서로가 서로와 다툼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떻게 우리 됨이 있고 더불어 감이 있겠는가? 여기에서 신앙은 또 무엇인가? 성경 공부라면서 성경 줄거리를 안다고 삶이 바뀌었다고 한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그저 바뀌었다고 말하고 다닐 뿐, 사실 책 줄거리 아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독한 말투로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성경공부한다 자랑하는 것은 얼마나 웃긴 일인가? 우선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는 돌을 던지지 않는 것으로 부터 참다운 성경 공부, 입으로 하고 말과 글로 하는 성경 공부가 아니라, 삶으로 이루는 성경 공부가 될 것이다.
교황의 강론은 핵심을 찌르고 있다. 그렇다. 누군가의 불행과 고난에 고개 돌리고 스스로의 안락만을 추가하는 삶, 그 삶에 익숙함에 문제다. 그리고 큰 의도성 없이 그냥 그렇게 작동되는 악마 기계가 되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눈물이 난다. 성경을 들고 성당을 찾고 교회를 찾아도 그들 일상의 공간에선 얼마나 제대로 된 신앙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말로 하는 기도, 그 기도뿐이지, 우리 하느님에게 참으로 우리의 모습으로 다가섰는가? 우리 가운데 이웃의 아픔에 고개 돌리고, 아니, 고개 돌리지 않아도 두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지도 않는 혼으로 어찌 신앙을 이야기하는가?
그 아픔의 눈물을 우리 가운데 너의 눈물이 아닌 남의 눈물, 아니 그것도 아니라, 아예 눈물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자시 배부름만을 보고 살아간다. 개인의 기쁨 속에 우리의 행복은 무너지고 성당 역시 누군가는 친목 단체로 생각하고 누군가는 명상원 정도로 생각한다. 교회는 클럽 활동하는 곳이 아니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다. 조선 땅 치열하게 공부하며 신앙의 가치를 깨우치고 신분의 경계를 스스로 넘어선 신앙 선조들을 보아라. 형제 자매로 하나된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들에게 성당이 과연 클럽 활동이나 하고 명상원 유사한 그런 곳으로 있었겠는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공부하고 우리 가운데 너의 아픔을 안아주며 그렇게 박해의 시간을 신앙으로 이겨내었다.
따스함도 없고 치열함도 없는 교회, 과연 이런 교회에 예수의 그 따스함이 있기는 하겠는가? 성탄...예수가 우리에게 다가올 그 자리는 아직도 우리에게 없는 것은 아닐지 돌아보자.
나의 옆, 우리 가운데 이웃은 얼굴 없는 익명의 누군가가 아니다. 신앙 가운데 하나되어 있어야 할 신앙의 핏줄로 이어진 뜨거운 형제이고 자매이다. 우리이다. 더불어 울고 웃어야 할 우리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19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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