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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신학199

유대칠의 '교부학' 서론 (2020년 1월 4일) 유대칠의 '교부학'Patrologia Daechilyi 1. 서론 ‘교부학’이란 학문은 기본적으로 ‘역사신학’에 속한다. 역사 속 과거 문헌과 그 전통 속 지혜를 궁리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갈래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부학을 단순히 그리스도교라는 하나의 틀 속에 구속하여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만 지혜를 주는 것이 아닌 신앙 앞에서 혹은 참된 행복을 향한 사람의 다양한 역사적 몸짓과 궁리함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실천을 살피려는 이들에게도 소중한 철학적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원시 불교의 가르침이 단순한 불자에게만 유익한 지혜의 말씀이 아닌 것과 같이 그렇게 교부의 가르침 역시 인류 보편의 지혜를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지중해 연.. 2020. 1. 4.
더불어 있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다. "자네는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지 않았고,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거절하였네."(욥기 22,7) "배부른 자는 꿀도 짓밟아 버리지만 배고픈 자에게는 쓴 것도 모두 달다."(잠언 27,7)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고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신앙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주지 않을 핑개를 찾지 않는 것, 이런 저런 조건 속에서 주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가난한 이의 아픔 앞에서 사치를 부리며, 기본적인 생활도 힘든 이들 앞에서 자기 과시를 하는 것이 자랑이 아님을 아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의 기본은 부끄러움이다. 목마른 이와 배고픈 이의 그 아픔 가운데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나의 소유가 부끄러운 것이 신앙이다. 소유가 아닌 공유를 위하여 있을 곳으로 자기 자신 것을 돌리는 것이.. 2020. 1. 2.
따스해지려한다. 나는 무시와 조롱이 일상인 곳에서 일했었다.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않은 조롱의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고갔다. 그 가운데 아픈 나는 그저 무력하게 아프기만 했다. 어디가서 말할 곳도 없이 그저 나는 무력한 슬픔이었다. 나의 이 아픔이 아픔이 아닌 조롱으로 이어질까 친한 벗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책망함으로 이어질까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홀로 있는 나는 별 수 없이 홀로 있었다. 무력한 슬픔으로 말이다. 조롱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들 사이, 나의 귀는 닫혀지고 나의 말은 매서워졌다. 귀로 들리는 말은 아프게 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독한 날카로움을 토해냈다. 삶이 그랬다. 혼자 있는 것이 덜 아프다 생각했지만 아프게 외로웠다. 나와 같은 생각만이 나의 위로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와 .. 2019. 12. 28.
그는 지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첫째 이웃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교부 사제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교구 사제는 여러분의 첫째 이웃입니다. 사제는 주교의 첫째 이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첫째 이웃은 사제입니다. 사제는 주교에게 반드시 필요한 협력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제에게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말아야하고 아버지, 형제, 그리고 친구처럼 돌봐야합니다." (2013년 9월 19일 새주교 선임을 위한 회의에서 하신 말씀) 오랜 시간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 과거부터 권력을 가진 종교인은 항상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런 모습은 여러 종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확인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시간 그리스도교가 이어온 것은 .. 2019.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