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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신학199

불행하여라! 욕심에 사로잡힌 이들이여! (암브로시오 <나봇이야기> 읽기) 불행하여라! 욕심에 사로잡힌 이들이여! -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의 것입니다.” (요한 코리소스토무스, 2,6) 교부들에게 ‘소유’와 ‘공유’는 매우 주요한 고민거리입니다. ‘소유’란 ‘나의 것’이 기본이고, ‘공유’란 ‘우리의 것’이라 말입니다. 소유 중심의 세상에선 나의 것 중심입니다. 나의 것이 더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소리를 치게 됩니다. 행복의 기준도 소유물의 크기입니다. 소유물의 크기가 큰 사람은 무엇인가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더 받은 사람.. 2020. 1. 17.
아니 계신 듯 계신 하느님 몇몇 사제와 목사의 악행을 두고 하느님의 부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렇게 없이 계신 하느님은 그 없이 있는 듯 보이는 시간 속 우리 자신이 하느님 계심의 증거가 되라는 것으로 듣는다. 거대한 몸짓의 힘이 없다면 자기 삶 속 작은 몸짓도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아니 계신듯 계신 하느님은 우리의 행함으로 계신 하느님, 그렇게 하나된 뜻 속에 모두가 하나됨으로 있게 하는 분이라 믿는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2020 01 12 2020. 1. 12.
참된 '하나 됨(보편)'이란? (일간 유대칠 2호 2020. 01. 11) "이것은 개별 교회 혹은 개별교구의 문제가 아닙니다. 온 세상의 문제입니다." - 치쁘리아누스, 서한 19 '개별'이란 말, '개체'라는 말, '낱개'라는 말, 이런 말은 기본적으로 흩어져있는 여럿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하나 됨이란 이러한 흩어져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해 집니다. 즉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는 흩어져있을 수 있지만 그 지향점이 한 곳을 향하면 그것은 하나로 있는 것이 됩니다. 가톨릭교회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지금 곳곳에 참으로 다양한 나라에 다양한 교구가 있습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도 있고,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에도 그리고 아프리카에도 다수의 여러 교구가 있으며, 그 교구엔 또 여러 성당이 있습니다. 그 성당에 또 다수의 성도들이 있고 사제들이 있습니.. 2020. 1. 11.
'깨우침'이란... 깨우친다는 것은 자기 안으로 도피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고 들어가 그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참다운 깨우침은 자기 자신의 아집을 깨고 자기 밖으로 나아가 너와 더불어 우리 됨이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아집을 깬다는 것이다. 그 깸이 깨우침이다. 이웃을 피해 산으로 숨는 것이 깨우침이 아니다. 이웃을 향하여 자기 아집을 깨는 것이 깨우침이다. 자기 답만을 답이라 고집하는 것이 깨우침이 아니며, 그 깨우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정말 진리로 인하여 자유로워진 영혼은 자유롭기에 변화하고 역동한다. 어제 참이라 깨우친 것이 오늘은 거짓이라 깨우쳐질 수 있다. 어제는 남의 깨우침이 오늘은 나의 깨우침이 될 수 있다,. 깨우침은 하나의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자.. 2020.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