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유대칠70 '나'란 원소들이 모여 세상이란 전체를 이룬다. (일간유대칠 5호 2020.01.18) '나'란 원소들이 모여 세상이란 전체를 이룬다. 나는 모든 지난 삶의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큰 사건 몇몇을 기억하며 산다. 그러나 나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분명 그때 그 시간 혹은 순간은 있었다. 20년 전 오늘 이 시간 나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나는 분명 무엇인가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나름 그 순간 소중한 나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삶에서 나는 거의 대부분의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그 대부분의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기억되지 않지만, 그 익숙함의 결실이 지금의 나란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기억의 큰 순간들은 나답지 않은 것들이 많다. 나답지 않아서 기억한다. 어느 정.. 2020. 1. 18. 참된 '하나 됨(보편)'이란? (일간 유대칠 2호 2020. 01. 11) "이것은 개별 교회 혹은 개별교구의 문제가 아닙니다. 온 세상의 문제입니다." - 치쁘리아누스, 서한 19 '개별'이란 말, '개체'라는 말, '낱개'라는 말, 이런 말은 기본적으로 흩어져있는 여럿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하나 됨이란 이러한 흩어져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해 집니다. 즉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는 흩어져있을 수 있지만 그 지향점이 한 곳을 향하면 그것은 하나로 있는 것이 됩니다. 가톨릭교회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지금 곳곳에 참으로 다양한 나라에 다양한 교구가 있습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도 있고,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에도 그리고 아프리카에도 다수의 여러 교구가 있으며, 그 교구엔 또 여러 성당이 있습니다. 그 성당에 또 다수의 성도들이 있고 사제들이 있습니.. 2020. 1. 11. 성당, 거대함의 추구 (일간 유대칠 1호 2020.01.10) 가족과 전주 전동 성당을 찾은 일이 있다. 주일이라 미사 참례를 하고 주변을 돌아 보았다. 성당이 참 아름다웠다. 대구 집 가까이 가실 성당과 다른 모습이고 평소 자주 보던 계산 성당과도 다른 모양으로 전동성당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성당에 대한 건축학적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준이 되지 못한 그 정도 수준의 말을 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 하다. 아름다웠다. 가실성당과도 다르고 계산성당과도 다르면서, 딱 한 번 찾아간 서울의 명동성당과도 다르면서 말이다. 중세 성당은 제법 유명하다. 거대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유럽의 성당은 이 땅의 성당과는 다른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나는 유럽을 가본 적이 없다. 사진으로 본 것이 전부다. 사진 속 성당만으로도 이미 가실성당과.. 2020. 1. 10. '깨우침'이란... 깨우친다는 것은 자기 안으로 도피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고 들어가 그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참다운 깨우침은 자기 자신의 아집을 깨고 자기 밖으로 나아가 너와 더불어 우리 됨이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아집을 깬다는 것이다. 그 깸이 깨우침이다. 이웃을 피해 산으로 숨는 것이 깨우침이 아니다. 이웃을 향하여 자기 아집을 깨는 것이 깨우침이다. 자기 답만을 답이라 고집하는 것이 깨우침이 아니며, 그 깨우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정말 진리로 인하여 자유로워진 영혼은 자유롭기에 변화하고 역동한다. 어제 참이라 깨우친 것이 오늘은 거짓이라 깨우쳐질 수 있다. 어제는 남의 깨우침이 오늘은 나의 깨우침이 될 수 있다,. 깨우침은 하나의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자.. 2020. 1. 7. 이전 1 ··· 14 15 16 17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