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518 중세의 철학과 지금의 나 2019년 10월 29일 - 왜 하필 성자인가? 중세 사람들은 이유가 참 궁금했다. 삼위일체라면 동일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있다면 왜 굳이 성자의 육화를 통하여 성자에 의하여 구원 사업이 이루어진 것일까? 오세르의 윌리엄은 에서 이 문제를 묻는다. 왜일까? 윌리엄은 요한 복음서를 보라 한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성자로 인하여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 그를 통하지 않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요한 복음서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이 문제와 무슨 소용인가? 생각해 보자. 성자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은 창조 이후 재창조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선 처음과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처음 창조가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재창조에서도 모든 이들은 성자를 통하여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윌리엄의.. 2019. 10. 29. 더불어있다는 것의 의미 철학은 뒤에 서 있다. 앞에 있지 않다. 나란 있음의 주체도 치열한 생각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주체만이 자기 철학을 가진다면 철학은 삶의 뒤에 찾아온다. 돌아보면 그때서야 망각 속에 있던 그 주체를 깨우치듯, 그리고 그 깨우침에서 철학이 오듯이, 철학은 분명 삶의 뒤에 온다. 그 돌아봄으로 알아야할 참됨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든지 아니면 살아가면 일구어가는 후천적인 것이든지 그 참됨을 향할 그 주체는 바로 여기 나다. 자연과학이 아무리 앞서가도 그 참됨을 향하는 길의 얼마나 다양하더라도 그 주체는 나다. 그런데 그 주체란 것이 그리 보면 바로 '나'인데. 그 나란 있음의 무엇임은 나만의 몫이 아니다. 나란 존재의 무엇임은 나와 더불어 사는 너와의 만남에서 일구어지고 자라.. 2019. 10. 25. 유대칠의 철학사 이야기 1 젠장. 방금까지 제법 길게 적은 글이 날아갔다. 이것도 나의 잘못이다. 다시 적어본다. 돌대가리로 살기 힘들다. 고대 동아시아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살아가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배자가 등장했다. 작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갈 때는 가족 단위일 수 있지만, 이젠 그 정도의 작은 단위가 아닌 남들과 같이 살아가는 곳에선 어쩔 수 없이 법이 필요하고, 그 법을 유지할 권력이 필요했다. 당연히 지배자가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지배자는 처음엔 그저 힘이 쎈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힘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힘만으로 자기 ‘권력’의 ‘권위’를 정당화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천명’, 즉 하늘의 뜻에 따라서 지배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물.. 2019. 10. 17.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성경 읽기 12. 살아서 지옥을 살며 지옥을 만드는 이. 2019년 10월 13일 일요일 저녁 “제 마음을 신뢰하는 자는 우둔한 자이지만, 지혜 속에 걷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 가난한 자에게 주는 이는 모자람이 없지만, 못 본 체 하는 자는 많은 저주를 받는다. 악인들이 일어서면 사람들이 술어 버리고 그들이 멸망하면 의인들이 많아진다.” 잠언 28장 26-28절 자기만을 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듣고자 하는 말만 듣는다. 호의의 말도 나쁜 마음으로 들으면 나쁜 것이 되고 응원의 말도 나쁜 마음으로 들으면 조롱으로 들린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그 답답한 틀 속에서 지옥을 살아간다. 하지만 귀를 열어 희망을 듣지 않는다. 응원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랑과 신뢰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세상은 사악하고 그것이 원래 세상.. 2019. 10. 13. 이전 1 ··· 118 119 120 121 122 123 124 ··· 13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