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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없다. 환경을 생각하는 여러 신학적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교황은 2019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제20회 국제형법학회(AIDP) 총회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일종의 죄로 규정할 필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자연 파괴를 그를 생태 학살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2015년 회칙 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사용할 주체로 오랜 시간 여기던 종교의 생각들은 자연을 항상 타자로 여기게 만들었다. 타자 가운데도 무척이나 무력하게 사람의 사용을 기다리는 그러한 타자다. 그렇기에 종교적 자연의 무리한 사용과 파괴는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되지 못했고, 감성적으로 아파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환경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매우.. 2020. 11. 22.
바흐와 보에티우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해진다. 오늘 우연히 너무나 익숙했던 곡을 다시 듣게 되었다.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3번 D장조 BWV 1068(Orchestral Suite No.3 in D Major BWV 1068)'이다. 어딘가 한 번을 다 들은 곡이다. 음악을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수학의 갈래에서 생각했다. 보에티우스는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음악이라 보았다. 사실 음악은 매우 수학적이다. 그렇게 수학적 사유의 범주 아래에서 음악은 다루어진 것이 고대와 중세의 지중해 연안 사상가들의 생각이었다. 우주는 매우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이다. 불규칙적이지 않고 매우 규칙적이다. 그 규칙성에 우린 달력을 만들기도 하고 하루를 헤아리기도 .. 2020. 11. 21.
있어야 할 곳에 둡시다. (더불어 신학과 복음 읽기1)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땅에 쌓지 마시오. 거기서는 좀과 벌레가 갉아먹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갑니다. ( 6장 19절) 이후 예수께서는 이어서 어찌 살아야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제가 묵상한 바로 이 구절입니다. 이 부분은 대체로 흔히 Q문헌, 즉 예수 어록이라 불리는 곳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직접 전한 말씀이 분명하다는 것이겠지요. 암브로시오의 에서 암브로시오는 이 세상에 쌓은 재물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키는지 화를 내며 전해줍니다. 그 분노는 근거 없는 분노가 아닙니다. 바로 이 구절, 예수의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한 분노입니다. '공유'라는 말이 유행하며 영어 common에 대한 고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라틴어 commūnis에서 .. 2020. 11. 20.
전체를 향한 쉼없는 부서짐, 종교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하지 않을까?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의 마지막 계단이다. 전당을 굉장하게 짓는 것은 종교가 먹을 것을 다 먹고 죽는 누에 모양으로 제 감옥을 쌓음이요, 제 묘혈을 팜이다.” (함석헌, , 사상계 1956. 1월 30호) 항상 우리는 최선이라 말합니다. 이런저런 비판을 들으면 지금은 이런저런 대안들이 있어서 문제없다 합니다. 그러나 1956년 함석헌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무겁게 다가옵니다. 과연 이 생각에 무엇이라 답할까요? 결국 종교는 자기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끼리 우리 편이 되어 그 속에서만 살다 보면 우리 편의 밖은 보이지 않습니다. 밖을 모르는 안은 썩기 마련입니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 2020. 1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