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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174

놀리지 말자. (일간유대칠 2020.04.13) 다짐 한 것들이 있다. 무슨 거창한 것들이 아니다. 그냥 일상 속 소소한 것들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그 일상 속 소소한 것으로 살아간다. 나는 거대한 논리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 나의 삶은 일상 속 소소함의 연속이다. 그러니 나의 다짐도 그러한 일상 속 소소한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지킬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 절대 누군가를 놀리지 않는다. 나의 대짐이다. 놀리지 않는다. 어떤 것으로든 놀리지 않는다. 대화 중 그의 말투, 취향, 외모, 능력 등등 어떤 것으로든 놀리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나를 놀리는 것이다. 나를 정말 잘 아는 이들은 그래서 나를 놀리지 않는다. 어쩌면 조금 진지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름 나의 방식으로 웃긴 편이란.. 2020. 4. 13.
'부활'과 '자기내어줌' (<대한민국철학사> 읽기 2020.04.12) "나란 존재가 타자의 자기 내어줌으로 존재한다면, 나 역시 내주어야 한다. 그렇게 더불어 산다. 그렇게 더불어 삶으로 아름다운 생명이 가능하다." 536쪽 아파트 화단,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서 개미집이랑 이런 저런 풀들이랑 더불어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 개미집은 제법 커지고 힘 있던 풀은 사그러지고 또 옆 자리 다른 풀은 없던 것이 생겼다. 보이지 않을 때는 없지만 막상 보고 있으면 하나의 우주이고, 하나의 거대한 더불어 있음의 장이다. 그 작은 생명 가운데 그 어느 것이든 그저 홀로 있지 않다. 죽어 잡혀가는 어느 벌레의 사체, 그 사체를 나르는 개미를 보면 잔인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또 무엇인가를 위해 죽어지고 사라지고 녹아들어 다른 것을 위한 자신이 될 개미를 떠오르게 되기도.. 2020. 4. 12.
불쌍한 우리 (일간유대칠 2020.04.08) 우린 참 불쌍하다. 수년 전의 일이다. 친구가 사고로 죽었다. 두 명의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을 가진 친구는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작은 식당을 하는 친구의 어머니는 학자가 되고 싶던 친구는 직업 학원에 보냈다. 말은 스스로의 선택이라지만, 1998년 IMF의 상황에서 이미 오래 전 부터 다른 여인과 사는 아버지와 이미 오래 전 부터 아들만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어머니 사이에서 친구는 대학이 아닌 직장을 선택했다. 분명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강제성에서 말이다. 친구는 성실했다. 직장을 다니며 방송대를 다녔다. 사라진 아버지의 자리를 어머니는 남동생에게서 찾으려 할 것일지 모르겠다. 조금은 사태한 삶을 사는 남동생을 위해 어머니는 희생을 했고, 그 희생의 크기가 클 수록 친구의 희생도 동시에 커졌다. 그것.. 2020. 4. 8.
참된 진리는 더불어 있음으로 우리와 함께 한다. (<대한민국철학사> 읽기) "선한 것을 이루려는 정의의 마음은 사랑의 분노다, 정의란 사회적 표현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선한 것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눈 앞에 아파하는 너의 울음과 고통으로 달려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정의다. 사회 가운데 선한 것을 이루려는 민중의 분노가 정의란 말이다, 그렇기에 정의는 정의롭지 않은 나, 부끄러운 나, 달려가지 않는 나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하고, 그 자각 이후 더 이상 부끄럽지 않으려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487쪽 문익환이 향하려는 그 철학의 마지막 지향점은 부조리한 고난 속에서 울고 있는 지금 여기 바로 이 땅을 떠난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이 땅의 밖에 있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바로 여기 이 공간, 바로 이 공간을 가득히 채운 민중의 눈물, 그 눈물로 달려가.. 2020.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