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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철학65

전태일을 부른다는 것 (전태일과 함석헌 그리고 문익환) "그 참한 혼을 살려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전태일을 추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그에게 추도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불사른 사람에게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그보다도 차라리 우리가 그를 살려내야 한다고 하고 싶다. 전태일을 살려라. 그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 우리가 그를 차마 죽은 채로 둘 수가 없다. 아니다. 전태일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다. 그는 그 죽음으로 우리 앞에 삶을 절규하고 있다. 그런 그를 어찌 차마 죽음 속에 묻어두고 썩혀둘 수가 있느냐? 전태일을 살려야 한다. 왜 우리는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되나? 첫째, 그는 이 썩어지고 악독한 사회에서 참 드물게 보는 아까운 심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 2020. 11. 18.
행복하여라 7 참 평화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리니. (마태오복음 5장 9절)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힘센 사람이 등장하여 힘없는 사람 여럿을 조용하게 만들면 그냥 밖에서 보면 평화가 이루어진 듯이 보입니다. 한 명의 주인과 여러 명의 노비들이 사는 것도 그러할 것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과연 평화로운 나라였을까요? 양반들에겐 평화의 나라였을지 모릅니다. 자기들끼리 당파 싸움을 했지만 그런 정치권력 싸움 없이 지내면 큰 문제없이 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많은 노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양반끼리 일어난 여러 소송 가운데 하나가 노비 소유권입니다. 서로 다른 주인의 노비들 사이에서 아기 노비가 태어나면 남노비 주인의 소유인지 여노비 주인의 소유.. 2020. 11. 14.
'하나'의 목숨으로부터 '전체'의 목숨을 향한 '전태일'이라는 '다리' 누구나 자신의 세상을 살아갑니다. 비슷한 시대를 산 노가다 일꾼 저의 아버지와 대기업 삼성의 이건희는 같은 세상을 살았다고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았고 살고 있습니다. 그 세상에서 한 개인은 참으로 유한합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유한합니다. 나의 끝을 넘어선 아픔에 대해선 정말 말 그대로 남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당연시하고 살아갑니다. 나의 배고픔은 그리도 아프지만 남의 배고픔은 철저히 남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속에 유한하게 살아갑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남을 아프게 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년 전 한 친구는 지금 생각도 기억도 나지 않은 이야기를 저에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너 같은 지방대에 사라진 철학과 출신에 지금은 어디에도 소속이.. 2020. 11. 13.
이어지고 뭉치고 흩어지고 다시 이어지며 뭉치는 역사의 장.[ 숲 (이응노 2981년 작)] 한지에 잉크로 그려진 숲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중앙에 드러난 큰 몸짓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빈 공간에 강한 여백을 배경으로 그려진 획이 아닙니다. 공간의 배경인 듯이 그려진 듯 보이는 작은 몸짓들도 무엇인가 하나의 이상한 질서 속에서 혼돈의 외침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결코 중앙의 큰 몸짓만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듯이 그림의 경계 부분에서 강한 몸짓이 그림 밖 미쳐 이 그림에 담기지 못한 부분에서의 큰 몸짓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이게 합니다. 숲은 1981년 작입니다. 박정희는 시대가 사렸지만 역시자 독재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전두환의 잔혹한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광주에선 많은 이들이 시대의 어둠에 항거하며 죽어갔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역사의 영웅으로 그 이름이 그 높이 .. 2020. 11. 9.